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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허무는 광부들, 경북 칠곡군 아트랜스파머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1.12.01 07:25
  • 수정 2022.12.13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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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의 작은 마을. 괭이를 든 이들이 있다. 땅을 고르고 자원을 캐내고, 경계를 부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파머’다.

칠곡군의 어르신들은 지역문화를 일구는 주역들이다
칠곡군의 어르신들은 지역문화를 일구는 주역들이다

●이름을 불러 주는 일


나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흐릿하게 만들고 흑백으로 분리된 세계를 묽게 희석시킨다. 경계를 허문다는 건 마치 새로운 색깔을 창조하는 일과 같아서, 그런 일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한 톤 더 밝고 다채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경북 칠곡군은 경계를 부수는 이들, 아트랜스파머의 시선을 통해 매일 새롭게 채색되는 중이다.

석전리의 알록달록한 벽화는 경북 지역 대학생들의 작품이다
석전리의 알록달록한 벽화는 경북 지역 대학생들의 작품이다

대구의 독립문화예술단체 ‘인디053’의 경북본부였던 아트랜스파머는 2015년 개인 사업자로 출발해 2019년 가을,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칠곡군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청년예술단체를 설립해 지역의 청년 활동가들을 발굴하고 지역의 문화사업이 지역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형성하고 싶다는 고민에서부터 그들은 출발했다. 서울과 대구 각지에서 칠곡군의 가치를 알아본 청년들이 뜻을 함께했고, 지역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아트랜스파머의 활동은 아카데믹한 예술 중심의 지역문화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술은 매개였을 뿐, 삶의 고민을 문화적으로 해결하고 지역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그들이 가장 먼저 팔을 걷어 부친 일은 바로 ‘발굴 작업’. 칠곡군이 거대한 금광이라면, 아트랜스파머는 괭이를 든 광부였다. 노다지를 발견하고 지역의 자원을 채광하고, 예쁘게 다듬어 세상에 내보이는 광부. 지역의 숨겨진 인문, 지혜, 언어 자원은 여러 활동을 통해 부지런히 채굴되기 시작했다. 어르신문화프로그램 ‘우리의 말말말’이 대표적인 예다. 아트랜스파머는 지역의 청년들을 모집해 어로1리에선 농경지의 노동요와 옛말을, 미군부대 후문에 있는 석전2리에선 상인들과 미군들끼리 쓰던 은어 등을 수집하고 기록했다. 그냥 휘발돼 버리고 말았을 칠곡의 언어 자원들은 ‘칠곡말모이사전’이란 이름 아래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았고,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겐 ‘칠곡어 편찬위원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냐는 질문을 던지니, 아트랜스파머 이유미 대표가 말한다. 그들의 활동은 곧 ‘호명하는 일’이라고.

왼쪽부터 아트랜스파머 구영민 주임, 이유미 대표, 박선희 주임, 김유진 주임
왼쪽부터 아트랜스파머 구영민 주임, 이유미 대표, 박선희 주임, 김유진 주임

“호명이라면,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건가요?”
“맞아요. 다른 말로는 발굴 작업이죠. 하루는 우연히 비닐하우스에서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 선생님께서 신문지로 새끼줄 꼬는 취미생활을 갖고 계신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마을회관으로 초청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새끼줄 꼬기 강의를 진행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죠. 그때 수업을 들은 주민 분들은 모두 재생공예 강사가 되셨어요. 그 후로 할아버지 선생님을 ‘명장님’이란 호칭으로 불러 드렸죠. 지금은 칠곡군 인문학 축제에서 체험 프로그램 강사로 활약하시고 종종 작품 전시도 하세요. 하마터면 그냥 묻혀 있을 뻔한 선생님의 재능을 세상 밖으로 꺼내 드리게 된  거죠. 호명되기 전까진 농사짓는 할아버지였을지 몰라도, 이름을 불러 드리자 명장님이 되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신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하는 일은 이름을 붙여 드리는 일입니다.” (이유미 대표)

 

지역의 지혜 자원을 발굴한 사례는 이뿐만 아니다. ‘말이 만드는 맛 레시피북’도 좋은 예다. 마을 주민들의 언어로 구술한 다양한 레시피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든 건데, 이를테면 ‘동동주는 뽀글뽀글 소리 나다가 소리가 없어지면 발효가 다 된 것이여’와 같은 식이다. 각자의 부엌에서 일어났던 평범한 일상은 다른 이의 입을 통해 호명되고 정리되는 과정에서 특별하고 소중한 기술로 다시 탄생한다. 마을 주민 개개인의 삶에 고유의 의미와 재능, 잠재력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호명의 힘을 거쳐 일깨워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아트랜스파머는 지역문화의 ‘기획자’를 넘어 ‘발굴자’가 된 기분이라고.

 

“이곳에 오기 전까진 칠곡군 자체를 하나의 꽃다발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을 곳곳에 들어가 보니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보이더라고요. 각 꽃들이 지닌 향, 꽃말, 특성까지도요.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일에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박선희 주임)

아트랜스파머의 사무실이자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인문다방
아트랜스파머의 사무실이자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인문다방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


물론 발굴 작업이 늘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니다. 기획부터 운영까지, 완전한 자급자족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아트랜스파머는 결코 주인공이 되는 법이 없다. 활동의 중심은 항상 참여자들. 테두리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건 아트랜스파머의 몫이다. 밤낮없이 일하며 ‘work=life’의 삶을 사는 그들에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원초적이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일을) 왜 하세요?” 
따뜻한 문장이 여럿 오갔지만 결국 공통적으로 돌아온 답은 하나였다. 
“소통할 수 있어서요!”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사진으로 만나는 별의별 사람 이야기’ 프로그램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사진으로 만나는 별의별 사람 이야기’ 프로그램

아트랜스파머의 활동들은 모두를 품는다. 여기서 ‘모두’란 정말 모두다. 7살 어린아이부터 70~80대 어르신들까지, 폭넓은 세대를 하나로 어우른다. 전 세대는 활동 안에서 만나고 웃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이해한다. 토요문화학교 ‘사진으로 만나는 별의별 사람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칠곡군 관내 초중학생들이 어린이 기자단이 되어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삶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 아이들은 익숙한 스마트폰 매체를 활용해 농촌마을의 모습을 구석구석 촬영하며 자신이 사는 지역을 다시 보는 기회를 갖는다. 올해로 2년째를 맞이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반응이 좋단다. 

 

“칠곡군은 도농복합지역이라 도시민들도 많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농촌 지역은 구역이 좁다 보니 도시에만 인구가 몰려 있죠. 칠곡에 살지만 칠곡의 농촌은 가 본 적 없는, 심지어는 칠곡에 농촌이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평소엔 전혀 접점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의별 사람이야기’ 같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 줄 활동이 필요했거든요. 다행히 아이들이 무척 신기해하고 재밌어 하더라고요. 다양한 세대와 함께 소통할 수 있다는 건 저희 일의 큰 장점 중 하나예요.” (이유미 대표)


이러한 연결고리를 꿰어 내는 주역은 대부분 청년들이다. 그런데 아트랜스파머에서 청년은 일반적인 청년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니까,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이쪽 세대와 저쪽 세대의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모두 ‘청년’이다. 아트랜스파머와 마을 사이에서 칠곡군 지역문화의 행동대장 역할을 왕성히 하고 있는 활동가 선생님의 나이는 올해 61세다. ‘말말말’ 프로그램에서도 80대 어머님들의 언어를 기록하는 주 참여자들은 40대 주부들이다. 20대 대학생도, 40대 엄마들도, 60대 아저씨도, 아트랜스파머에선 다 청년에 속한다.

 

“청년은 허리 세대, 즉 중간 세대예요. 공동체 안에서 뭔가를 계속 전달하고 연결해 주는 활동가 역할을 한다면, 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인거죠. 아트랜스파머에서 청년은 곧 ‘매개자’로 치환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이유미 대표)  

 

청년 세대가 가진 또 다른 능력은 단순히 연결고리 역할을 넘어서 기존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재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트로(Netro) 열풍이 분 것처럼, 기성세대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젊은 세대에겐 유니크하고 독특하게 느껴지곤 한다. ‘말말말’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어르신들이 과거에 모내기하며 불렀던 노동요는 지금의 청년 세대들에겐 신선하고 생경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낯선 경험은 ‘기록해 둬야 할 무언가’로 남는다. 

 

“‘말말말’에선 청년 참여자들이 인문학 합창단을 만들어 80대 어르신들의 노동요로 율동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기도 해요. 문화의 원 소스는 지금도 살아 있어요. 그 가치를 발견하고 다음 세대까지 명맥이 끊기지 않도록 연결해 주는 일을 청년들이 하고 있는 거죠. 마치 베스트셀러 책이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다양하게 각색되는 것처럼, 지역의 문화자원을 다방면으로 활발하게 활용하는 것. 전통은 살리되 자신만의 관점에 맞춰서 새로운 문화로 이어 가는 것. 그것이 결국 지역문화에서 청년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구영민 주임)


“참, 한 어르신 참여자 분이 하셨던 말씀도 기억나요. 연세가 많이 드셔서 이제는 노동요도 가물가물하고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구나. 얼른 기록해 두어야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기록을 할 수 있는 세대가 결국 청년 세대가 아닐까요?” (김유진 주임)

 

세대 간 장벽을 허물고 연결고리를 꿰어 내는 연결자. 전통을 재해석하고 아카이빙해 다음 세대까지 잇는 매개자. 그리고 그 모든 몸짓들을 기록하는 기록자. 아트랜스파머, 나아가 칠곡군에서 청년이란 바로 이런 역할을 해내는 이들이다.

지역의 폐기물을 모아 만든 업싸이클링 작품. 왜관10리 곳곳에 전시돼 있다
지역의 폐기물을 모아 만든 업싸이클링 작품. 왜관10리 곳곳에 전시돼 있다

●매개자를 넘어 확산자까지


청년 세대가 매개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칠곡군 주민들의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가 큰 몫을 했다. 이른바 ‘꼰대’ 문화가 전혀 없다는 것. 머리를 빨갛게 염색해도 예쁘다고 칭찬해 주시고, 귀에 피어싱을 여러 개 뚫어도 하나 더 뚫어 보라고 하신단다. 칠곡군에는 나와 다른 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수용력이 도시 자체에 존재하는 것 같다고.


이제 칠곡군 청년들에겐 이러한 칠곡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외부로 확산시킬 수 있을지의 고민이 남아 있다. 지역 내에서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외부와 내부를 잇는 연결망 역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라고.

 

“청년들이 없다면 지역은 고립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청년들이 가진 외부 커뮤니티와의 관계망은 정말 넓거든요. 지역에서 발견된 인문적 가치는 도시 밖으로 확산돼야 하고, 반대로 외부의 가치도 지역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청년들은 안팎으로 다양한 가치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하면 매개자를 넘어 확산자의 역할까지 ‘잘’ 수행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이유미 대표)

 

칠곡군이란 금광 아래, 아트랜스파머는 괭이를 들었다. 예리한 괭이 끝으로 세대 간 보이지 않는 벽을 부수고, 땅을 파고 흙을 고르며 지역문화의 토양을 다진다. 괭이는 때론 곡괭이가 되어 부지런히 지역의 숨겨진 자원을 캐낸다. 깊은 땅 속 지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역의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단단한 괭이질을 하는 아트랜스파머야말로 진정한 ‘광부’이자 ‘파머’가 아닐까. 아직도 칠곡군엔 발견되지 않은 노다지가 가득하다. 그들의 괭이 끝에서 또 어떤 자원이 세상에 나올지, 나는 오늘도 감히 기대 중이다. 

 

*아트랜스파머는 농산어촌 지역의 인문, 문화자원을 발굴해 지역문화 활성화 및 성장을 도모하는 문화예술전문단체다. 경남 칠곡군에 자리를 틀고 지역문화 자원조사, 마을만들기, 워크숍 등 다양한 지역문화프로그램을 전파 중이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사진제공 아트랜스파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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