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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형의 달콤 쌉싸름한 라틴아메리카 여행일기 9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6.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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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흔들’ 라틴아메리카 버스 여행



"인생은 말이야, 깨어 있는 자들을 위한 거야. 자, 한잔씩 마시자고. 칵테일로 만들어 줄까? 여기 얼음도 있다네."

쿠바 아바나에서 산티아고 데 쿠바를 향하는 버스 안. 앞자리의 40대 신사는 주섬주섬 일회용 컵과 위스키를 꺼내더군요. 그리곤 주변 승객들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새침하게 있던 미국 여행자들도 처음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더니, 아저씨의 흥겨움과 박식함에 녹아들고는  그가 준 잔을 계속 입 안에 털어 넣더군요. 관심 없는 척 어두운 창밖만 감상하던 저도   결국 분위기에 취해 ‘즐거운 인생’을 외치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답니다.

라틴아메리카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버스 이야기’. 진짜 닭들과 나란히 여행하는 과테말라의 '치킨 버스', 비포장도로를 하염없이 달리는 볼리비아의 시골 버스, 전쟁 영화 5편을 내리 틀어 주던 페루의 버스, 한 시간 내내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청년 옆에 앉았던 칠레의 뚜르 버스까지 라틴의 다양함을 버스에서 엿볼 수 있거든요.  

남미에서는 '버스를 탄다'고 하면 기본 10시간 걸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워낙 넓고 길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나라 칠레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버스로 70시간을 가야 할 정도거든요.

페루에 도착한 첫날, 버스 터미널에 갔을 때의 그 충격이란! 페루 리마에서 국제버스를 운행하는 오르메뇨라는 터미널에 갔더니 리마에서 '에콰도르의 키토까지 가는 버스는 36시간, 콜롬비아의 보고타까지 가는 버스는 3일'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더라구요.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가득 찬 버스의 추억

버스에는 희로애락이 모두 숨어 있습니다. 온두라스 제2의 도시 산페드로술라에서 마야 유적이 있는 코판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정말이지 울고 싶었습니다.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생필품으로 가득 찬 버스 정류장에서 '코판'을 외치는 저를 차장이 막 쓰러질 것 같은 버스에 태우더군요. 

버스는 조급한 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골 구석구석의 모든 정류장을 순례하듯 돌더군요. 그런데 확인해 보니 그 버스는 코판으로 가는 게 아니라 코판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만 가는 버스였습니다. 

이미 어둠은 내리고 코판 가는 버스가 끊긴 지는 오래 전. 그 와중에 깜깜한 버스 안에는 조지 마이클의 '케어리스 위스퍼'와 닭의 울음소리가 합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악몽은 친절한 현지인 카르멘을 만나 그 집에서 신세를 진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겨우 엉덩이 한쪽만 의자에 걸친 채 들었던 생경한 조지 마이클의 목소리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더군요.

와인까지 서비스되는 아르헨티나의 버스 

끝없는 라틴의 버스 이야기 중에서도 꼭 들어가야 할 나라가 아르헨티나입니다. 남미를 여행한 여행자들이 넘버원으로 꼽는 버스가 아르헨티나 버스거든요. 저도 멋진 오빠들이 향기로운 레몬수를 퐁퐁 손에 뿌려 주는 터키 버스에 엄지손가락을 올렸지만, 아르헨티나에서 버스를 탄 후부터는 순위가 바뀌었답니다. 

편안하게 뒤로 넘어가는 편안한 침대의 상태도 그만이지만 아르헨티나 버스가 차별화되는 이유는 식사에 있더군요. 저녁 식사로 푸짐한 스테이크가 나오거든요(물론 샐러드와 파스타도 함께요). 뿐만 아니라 와인도 곁들여 나온답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칵테일도 한잔 할 수 있구요. 잘 때는 따뜻한 담요도 나눠 주고요. 마치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를 탄 듯 여유 있게 버스 여행을 즐길 수 있거든요.

버스에서 바라본 라틴의 풍경들

버스에서 바라본 라틴 특유의 풍경들도 버스 여행을 즐겁게 만들어 준답니다. 마치 영화 <나르니아>에 들어온 것 같은 판타지 한 분위기의 에콰도르 산동네, 융단을 펼쳐놓은 듯한 안데스 산맥, 파스텔 톤의 하늘과 땅이 만들어 내는 그림 같은 풍경의 볼리비아 시골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파타고니아의 도시들. 조그만 창 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한 산바람도 길 위에서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길고 긴 버스 여행이 힘들 때도 많았지만, 버스 여행은 이렇게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선물해 줬답니다. 서울에 돌아가면 괴상망측한 중미의 버스들과 퍼스트 클래스처럼 편안했던 남미의 버스들이 무척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채지형 pinkpu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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