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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가 끝나고 난 뒤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2.02.01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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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로 향하는 비행기.
그곳에서 고요의 바다를 유영했다. 

 

일찌감치 게이트를 향한 이유


몇 년 전 어느 겨울. 나는 무슨 이유로 중국 상하이를 갈 일이 있었다. 아침부터 운이 좋았다. 공항버스도 금방 왔고 카운터에서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를 해 준 터라 굉장히 신이 나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라운지로 잽싸게 달려가 밥을 두 접시나 퍼먹었다. 여전히 20여 분 여유가 있었지만, 오만함으로 무장하고 일찌감치 게이트로 향했다. 남들이 리을(ㄹ)자 모양으로 줄을 설 무렵 ‘상위 클래스 줄’로 입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입장하는 것이 상위 클래스의 최고 덕목이라 여기고 있었던 까닭이다.

보딩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가 나오면 무수한 시선을 뒤통수에 주렁주렁 달고 아주 느릿하게(그래야 자주 타 본 태가 난다) 걸어야 한다. 입꼬리를 2mm 정도만 올린 미소를 머금고. 제길, 너무 일찍 탔다. 휴일 아침 좌석인지라 자랑할 만한 이가 별로 없다. 사회관계망(SNS)에 슬쩍 ‘이제 출발, 피곤함’이란 제목으로 올렸는데 반응이 없다. 물론 얼굴 뒤로 좌석이 모두 보이고 ‘매우 간결한 좌석번호’가 찍힌 탑승권까지 걸리도록 사진을 찍어 곁들였건만 “잘 다녀오셈. 담배 사 와!”라는 눈치 없는 친구 녀석의 댓글만 달랑 하나 들어왔다. 난 창가 쪽 좌석표를 가진 이를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복도 쪽 좌석에 앉아 스파클링 와인을 홀짝이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코쿤 형태의 독립 좌석이 아니라 앞뒤 양옆으로 넓기만 한 구형 비즈니스석이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어떤 남자가 옆자리를 가리켰다. 먼저 앉은 것이 미안할 정도로 연신 굽신거리며 좌석으로 향하던 그 남자는 고작 A4용지 한 권 정도만이 들어갈 정도의 가죽 케이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륙 준비를 할 때까지 그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그 귀한 스파클링 와인도, 봉지에 든 믹스너트도 마다한 채 분주한 활주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틀림없는 초보 여행자다. 누구에게라도 이번 비행을 자랑해야겠기에 나는 그에게 허세를 떨기로 마음먹었다.

 

전 여행작가입니다만 


“상해는 처음이십니까?” 꼭 상해라 해야 한다. 왠지 상하이라 말하면 초행길 같다. 반대로 미국에선 LA를 ‘엘레이’라 발음해야 하는 것처럼. “네.” 널찍한 옆자리 창가에 앉은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굉장히 성의 있는 눈망울을 내게 보였다. 


‘하하 그럴 줄 알았다. 보아하니 해외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으로 사이판이나 갔다 온 게 전부겠군!’ 그의 슈트는 단정했지만 그리 비싸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비즈니스석에 탔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한 차림새였다. 


“아하, 일로 가시는군요?” 아마도 회사나 거래처에서 끊어 준 티켓이 업그레이드됐을 거라 단정했다. 난 그가 공항에 내리자마자 건설이나 토목, 아니면 원자재가 오가는 물류 현장으로 달려가, 무더위 속에 일해야 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담배도 한 대 피울 겨를도 없이. 


“아닙니다. 휴가로 갑니다.” 비록 잠시지만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는 미소를 엿봤다. ‘어라 좋겠네. 요즘 같은 비수기에 상해 따위나 다녀오다니. 뭐 가깝긴 하지, 게다가 요새는 호텔비도 싸고!’ 다시 한 번 그를 훑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모든 것은 메밀전병처럼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절대로 티타늄이나 카본 따위가 아닌 국산 금테 안경다리에 주렁주렁 걸린 구레나룻, 이발한 지 오래다. 다만 손에 든 잡지 <좋은 생각>은 그가 순하고 착한 사람이란 것을 널리 광고하는 듯했다. ‘사회주의자들을 선교할 목적으로 떠나는 전도사일까? 아니지 아니야, 휴가랬잖아? 그동안 제휴카드를 많이 썼나? 그래, 어차피 해외에 자주 못 나갈 거라면 어쩌다 한 번 갈 때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이 낫지! 그런데 왜 와인을 주문하지 않지?’


“아, 휴가가 늦으셨네요, 해외엔 자주 나가시나 봐요?” 이미 머릿속에서 굳힌 생각과는 정반대의 질문을 하는 것은 정말 내가 자랑할 만한 고도의 화술이다. 정반합의 논리접근법이지. 알고 있나? 이래 봬도 난 여행작가라고. 


“네, 남들보다는 조금.” 조금 놀랐지만, 표정은 숨겼다. 급히 눈을 돌려 모니터를 봤다. P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 목소리가 살짝 떨렸잖아? 척 봐도 여권에 도장 몇 개 없겠구먼. 중국어는커녕, 영어도 잘 못하게 생겼어. 성문기본영어라도 땠을까?’


“저도 좀 다녔습니다. 여행을 기록하고 있거든요!” 아, 어쩜 이리도 근사한 말이 있을까. 내가 생각해 냈지만 자랑스럽다. “여행작가인데요” 혹은 “여행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같은  멘트는 너무도 별로이지 않나. 그가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졸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의 바다


비행기는 이륙하기 시작했다. 이륙 소음이 이어질 때까지 난 말을 이어나갔다. “한 20년 동안 120개국 정도는 다녔나 봐요. 비행기만 봐도 지긋지긋합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슬그머니 숫자를 대화에 올렸다. ‘120개 나라 정도’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표정을 훔쳐봤다. 다시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뜸이 길었다. 그러나 별수 없었다.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값싸고 불필요한 물건을 주문해 놓은 사람처럼 그저 그의 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야박한 그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뭐 유럽 도시들은 근대까진 모두 국가였으니까요.” 변명한다는 것은 뭔가 불안해진 탓이다. 거기다 무엇을 덧붙이는 것은 최악이다. “전국시대의 일본도 그렇잖아요?” 말을 돌렸다. 내가 여행기자를 오래 했으며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녔다는 것을 이 ‘여행 찌질이’ 아저씨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안전벨트 등이 꺼지고 난 후 승무원에게 ‘다이어트 코크’를 주문했다(이때도 다이어트 콜라라고 하면 안 된다. 반드시 ‘코우크’라고 발음해야 한다). 상냥한 미소로 다가온 승무원은 다이어트 코크가 없다며 대신 제로 코크를 줬다.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대부분 항공사에서 은색 다이어트 코크 대신 까만색 제로 코크로 바꿨다는 것을. 하지만 ‘다이어트 코우크’라고 말해야 비행기를 자주 오랫동안 다양하게 탄 사람이 되는 것도 난 알고 있었다.

“귀가 아프세요? 기압 때문이죠. 뭐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는 살짝 감사의 미소를 비추며 나와 같은 것을 주문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익숙한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렷다. 금방 수준 높은 여행자가 되겠어. 나처럼.’ 흐뭇해진 나는 이 엉성하고 모자란 초보 여행객을 위해 많은 여행의 스킬을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저녁 비행편 같았으면 파이퍼 하이직이나 멈 로제 같은 샴페인이 좋았을 텐데, 도착하면 바로 취재를 해야 해서요, 하핫!” 그는 잠깐이지만 골똘히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그런 것도 주나요?” 내가 대답했다. “네, 이 항공사는 비즈니스 클래스 서비스가 꽤 괜찮은 편이지요. 연착이 잦긴 하지만요!”


“선생님도 자주 이용하시나 봐요?” 두 번째 공격이다. 이번엔 제발 겸손해라. 이 위대한 여행기자 앞에서. 항공기 안에선 탑승 경력이 깡패 아니겠나. “네, 가끔. 사실 일할 때는 다른 좌석에 더 많이 앉아 있지요.”


‘이겼다! 일(business)을 하려면 비즈니스석에 앉아야지, 이코노미석이라니 경제(economy) 전문가라도 되는 거야? 흐흐.’ 의기양양해진 나머지 난 지옥으로 가는 주문을 스스로 외우고 말았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일이 많으시군요,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가 대답했다. “아, 이 항공사에서 기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로 유럽, 두바이 노선을 담당합니다. 이번에 휴가라 친구를 만나러 난징에 갑니다. 그쪽은 여행작가시라고요?” 


왜 안대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A330-200 항공기 비즈니스석 내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허세가 끝난 뒤, 나는 어색함이 파도치는 고요의 바다를 유영 중이었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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