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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프랑스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2.05.02 0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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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과거의 시간 속에서 방부처리가 된다.
어제의 프랑스가 그렇다.

보고 싶었던 마이 디어 에펠탑

가장 맛있는 기억

 

지루한 얼음땡 놀이가 끝났다. 꼬박 2년 만이다. 쾅, 적막했던 여권에 입국 심사 도장이 찍혔다. ‘쾅’이 ‘땡’이 되는 순간. 최대치의 해방감이 몰려온다. 아, 얼마나 기다렸던 해동인지. 코로나는 정말이지 최악의 술래였다. 

그 어떤 여행보다 알차야 했다. 하루 평균 3만보씩 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짧은 일정 안에 많은 걸 보고 싶다면 답은 역시 근교 여행이다. 기차에 올랐다. 파리에서 출발해 르망(Le Mans), 앙제(Angers), 낭트(Nantes) 그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일정. 세 도시 모두 페이 드 라 루아르(Pays de la Loire) 지방의 주요 도시들로, 파리를 기준으로 8시 방향에 위치해 있다. 떼제베(TGV)로는 파리에서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2주면 파리 포함 4개 도시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는 얘기.

늦은 오후, 파리 사마리텐 백화점에 햇살이 빗금을 남긴다
늦은 오후, 파리 사마리텐 백화점에 햇살이 빗금을 남긴다

냉동인간이 100년 만에 깨어나면 이런 기분일까. 분명 현실인데 감각이 없다. 노마스크 일상도, ‘출구(Sortie)’ 글자를 봐도,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는 유로를 만지작거려도 벙벙하다. 그런 나를 깨워 준 건 다름 아닌 치즈. 프랑스 국민들은 1년에 인당 15kg의 치즈를 먹는다. 종류만 해도 300가지가 넘는다. 요리, 디저트, 토핑, 와인 안주…. 하여튼 안 쓰이는 데가 없다. 이번 여행에선 식사 때마다 온갖 치즈란 치즈는 다 섭렵했다. 그런데 문제(진짜 문제긴 한 게, 살이 2kg가 쪘다)는 맛없는 치즈는 단 한 개도 없었다는 것. 그때 알았다. 와, 여기 프랑스구나.

낭트의 레스토랑, 어제의 치즈를 팔던 곳
낭트의 레스토랑, 어제의 치즈를 팔던 곳

이런 오만한 확신도 갖게 됐다. 지구상 가장 맛있는 치즈는 어제의 치즈라고. 갓 만든 치즈는 신선하지만 찐득한 맛이 없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 아래 숙성되어 꼬릿한 향을 풀풀 풍겨 줘야 좀 치즈다워진다. 그런 치즈를 씹으면 시간을 씹는 기분이 든다. 고소한 과거의 맛. 기억도 치즈와 다르지 않다. 당일 생성된 기억은 신선하지만 뭐랄까, 깊이감이 덜하다. 맛있어도 맛있는 줄 모르고, 좋아도 좋은 줄 잘 모른달까. 진정한 여행의 맛은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부터 농익기 시작해 점점 더 짙어진다. 물론 모든 기억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기억이란 게 늘 그렇듯, 어떤 기억은 휘발되고 어떤 기억은 마모된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묻어 두어도 부패는커녕 풍미가 더해지는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파리 몽소 공원을 덮은 봄
파리 몽소 공원을 덮은 봄

여행을 마치고 거실 소파에 기대 누운 지금. 제일 달콤한 추억을 떠올리니 역시, 어제의 프랑스다. 그새 맛이 더 들었는지 한층 애틋해지고 깊어진 맛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프랑스보다 어제의 프랑스가 늘 더 그립다. 당분간 또 ‘얼음’인 채 살아가겠지만 조금도 서글프지 않다. 오래도록 숙성시킬, 어제의 프랑스가 남아 있으니.

 

●고요한 질주의 도시  
르망 Le Mans 

 

운이 따랐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르망 시내 중심, 생 줄리앙 대성당 앞. 노천시장 자코벵 마켓(Market Des Jacobins)에선 거래가 한창이었다. 노란 튤립과 신선한 굴, 흙 묻은 당근과 오래된 바이올린. 이 모든 게 바쁘게 주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인근 밭과 바다에서 난 농수산물은 일주일에 세 번, 아침 7시에 최고로 신선한 상태로 가판대에 오른다. 아무 과일(특히 납작복숭아)이나 골라도 설탕을 세 겹은 바른 듯 달콤하다. 

르망에선 셔터만 누르면 평범한 거리도 엽서가 된다
르망에선 셔터만 누르면 평범한 거리도 엽서가 된다

그래 봤자 평범한 동네 시장인데, 배경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시장 뒤로 펼쳐진 생 줄리앙 대성당과 그 뒤편으로 흐르는 사르트(Sarthe)강, 강과 성당 사이 세워진 붉은 성벽까지. 로마의 냄새를 맡았다면 제대로 짚었다. 기원전 47년,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했던 르망은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갈로-로만(Gallo-Roman) 도시 성벽 중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1,300m의 고대 로마 성벽이 대표적이다.

구시가지 ‘플랜태저넷 시티(Plantagenet City)’에선 15~17세기로 훅 넘어간다. 약 15만 평방미터 면적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걸쳐 지어진 100개 이상의 목조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골목이 유산이고 거리가 곧 박물관인 셈. 실제로 르망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후보지에 올랐다. 후보로만 남아 있기엔 아까운 이유가 넘쳐난다.

생 줄리앙 대성당 앞에서 열린 자코벵 마켓
생 줄리앙 대성당 앞에서 열린 자코벵 마켓
자코벵 마켓

그러고 보면 르망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기도 했다. 시내 한복판에서도 풀벌레의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도시. 그러니 엄청난 아이러니다. 이 느린 도시에서 그토록 빠른 자동차 경주가 벌어진다니.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봤거나 자동차 광팬이라면 금방 알아들을지도 모르겠다.

르망24시 박물관엔 대회에 참가했던 화려한 레이싱 카들이 전시돼 있다
르망 24시 박물관엔 대회에 참가했던 화려한 레이싱 카들이 전시돼 있다

르망은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카 레이싱 대회 ‘르망 24시’가 열리는 곳이다. 왜 24시냐면, 진짜 24시간 내내 경주를 한다. 매년 6월, 밤이 가장 짧은 날, 14km의 트랙을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아 가장 많은 랩(lap)을 돈 차량이 승리의 트로피를 거머쥔다. 특이한 건, 레이싱 트랙과 일반 도로가 섞여 있는 트랙을 돈다는 것. 삐까뻔쩍한 레이싱 카들이 두 개의 마을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는데, 대회 시즌엔 르망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된단다. 하루 꼬박 진행되니 새벽쯤 되면 드라이버도 관중들도 벤치 어딘가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웃픈(?)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고. 직관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다행히 르망 24시 박물관이 달래 준다. 

 

●웰컴 투 앙제랜드  
앙제 Angers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을 떠날 때 가장 좌절스러운 순간은 이미 본 듯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다. 여행 경험이 누적될수록 이런 순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유럽이 특히 그렇다. 비슷비슷한 성당에 거기서 거기인 거리들. 낯익은 풍경의 연속. 그런 이들에게 앙제는 말한다. ‘어이, 당신이 뭘 예상하든 난 더 놀라운 걸 보여 줄게.’ 그 말의 근거는 단연 앙제 성(Chateau d’Angers)에 있다. 

앙제 성에 오르면 앙제 시내와 멘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앙제 성에 오르면 앙제 시내와 멘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첫인상에서 이미 압도당했다. “대체 저게 뭐야?” 보는 이마다 내뱉는 실소 어린 감탄사는 1km의 두툼한 성벽과 17개의 우락부락한 방어 탑에서 비롯된다. 서유럽에선 보기 힘든 독특한 외관인데, 사실 위압적인 게 당연하다. 그러라고 만들었으니까. 군사적 요충지답게 앙제 성은 적의 함선이 멘(Maine)강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벽은 높게, 탑은 견고히 쌓았다. 적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앙제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지어졌고(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왕실 군대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자연히 달성됐다. 무려 13세기의 일이다.

한 편의 동화 같은 앙제 성 내부 풍경
한 편의 동화 같은 앙제 성 내부 풍경

겉모습은 마동석급 체격인데, 내부는 팅커벨처럼 올망졸망하다. 사람이든 성이든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깨달음. 언젠가 디즈니랜드에서 본 풍경과도 닮았다. 이건 거의 ‘앙제랜드’다. 잘 구획된 프랑스식 정원엔 이국적인 나무들이 콕콕 박혀 있고, 왕족들이 주거용으로 썼던 15세기 건물과 기도실이 딸린 예배당에선 유니콘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길이 140m의 세계 최대 중세 태피스트리 ‘요한계시록 태피스트리’는 성의 매력에 방점을 찍는다. 외관은 그렇게 위협적이더니만. 방어를 뚫으니 이런 아름다움이 기습해 온다. 

앙제의 오래된 거리, 자전거가 중세를 달린다
앙제의 오래된 거리, 자전거가 중세를 달린다
앙제 성의 육중한 방어 탑과 아기자기한 정원
앙제 성의 육중한 방어 탑과 아기자기한 정원

앙제 성만 보고 떠나기엔 앙제의 그릇이 너무 크다. 앙제는 고대 도시의 터다. 앙제의 그릇엔 앙제 성 말고도 오래된 거리, 성곽과 성당, 주택 등 중세의 유적이 찰랑찰랑 담겨 있다는 뜻이다. 앙제가 프랑스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3번이나 꼽힌 이유는, 오래된 것을 잘 보존하려는 노력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다. 

 

●조선업 도시의 예술적 부활
낭트 Nantes

 

초록 선으로 예술을 엮다


낭트가 처음이라면 바닥을 봐야 한다. 가이드북은 필요 없다. 길 위에 그려진 그린 라인(Green Line)을 따라 걷기만 하면 반은 성공이다. 이 선의 정체는 낭트의 ‘관광 로드맵’. 20km에 걸쳐 브르타뉴 공작 성(Castle of the Dukes of Brittany)을 비롯한 유적지, 쇼핑몰, 상점 등 낭트의 42개 스폿을 하나로 연결하는 선이다. 그냥 웬만한 명소들은 다 지난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낭트에선 두 가지만 기억하자. 길을 잃었다? 초록 선을 찾을 것. 어딜 갈지 모르겠다? 초록 선을 따라갈 것. 그럼 셀프 가이드 워킹 투어는 저절로 완성이다.

초록 선이 이끈 브르타뉴 공작 성
초록 선이 이끈 브르타뉴 공작 성

지금 낭트는 ‘물 들어오는’ 중이다. 발걸음만 봐도 알 수 있다. 연간 200만명의 관광객이 밀물처럼 낭트로 밀려오고 있고, 근래엔 인구도 매년 1만명씩 증가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도 어두운 과거가 있었으니. 19세기만 해도 조선업으로 이름을 날렸던 낭트는 1987년에 마지막 남은 조선소가 문을 닫으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유럽의 선박 

유난히 해가 들던 오후, 골목 어귀의 작은 카페에서
유난히 해가 들던 오후, 골목 어귀의 작은 카페에서

경기 침체 등이 원인이었다. 근로자들은 실직했고 도시는 버려졌다. 조선소 밀집지였던 시 중심부는 ‘고담 시티’가 됐다. 위기에 빠진 낭트시를 구원한 건, 바로 예술!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걸쳐 펼쳐진 예술축제 ‘레잘뤼메(Les Allumees)’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낭트는 30년간 문화 발전에 과감히 투자했다. 물 들어올 때 저은 노는 도시를 부활시켰다. 예술가, 건축가, 조경 정원사, 시인 등 각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낭트에 모여 상상력을 불태웠고, 텅 빈 비스킷 공장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나나 공장은 갤러리 카페로 변모했다. 그렇게 낭트는 도시재생의 전형이 됐다.

낭트의 보타니컬가든 호수에선 조각품도 휴식을 취한다
낭트의 보타니컬가든 호수에선 조각품도 휴식을 취한다

초록 선을 따라 걷는다. 선은 명소뿐 아니라 낭트의 예술도 엮는다. 낭트에선 길 위에 예술이 있다. 공원 호수에 조각품이 누워 있는가 하면 건물 앞마당에 설치미술품이 널브러져 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이라는 듯. 결코 호들갑스럽지 않다. 120점 이상의 공공 예술 작품은 도심 전체에 설탕처럼 흩뿌려져 낭트를 더 달콤하게 만든다. 낭트에서 예술은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시민 곁에 숨 쉬며 살아가는 ‘일상’이다. 한계 없는 예술, 그게 곧 낭트의 정체성이었다. 

 

낭트의 움직이는 성


방심한 새 흠뻑 젖었다. 이런, 살다 살다 코끼리 코로 물벼락을 맞아 보다니. 젖은 옷을 말리는데 카멜레온이 인사하고 나무늘보가 손짓한다. 머리 위론 새가 날아든다. 동물원이 아니다. 낭트의 ‘기계 섬(Les Machines de l’ile)’ 얘기다.

폐공장에 나뒹굴던 부품들은 예술가들에 의해 ‘기계 섬’으로 재탄생했다
폐공장에 나뒹굴던 부품들은 예술가들에 의해 ‘기계 섬’으로 재탄생했다

2007년, 버려졌던 폐조선소는 기계 동물 테마파크로 변신했다. 공장에 방치돼 있던 부품들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동물과 나무, 대초원 등으로 탄생했다. 기계 동물들 중 제일 인기 있는 녀석은 ‘자이언트 코끼리(Le Grand Elephant)’다. 기계 섬을 먹여 살린 장본인인 건 알겠다만, 솔직히 첫인상은 좀 해괴망측하다. 40톤의 철근과 목재로 만들어진 대형 코끼리가 다리에 동력 공급 기어를 달고 삐걱이며 걸어오는데,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처음 봤을 때 기분이다. 낯설고 충격적이다. 둘은 여러모로 닮기도 했다. 둘 다 고철로 만들어졌고, 탑승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코끼리는 높이만 12m다. 아파트 4층 높이쯤 되려나. 최대 50명까지 탈 수 있는 코끼리 등에선 루아르(Loire)강과 낭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가격은 한화로 겨우 1만원이 조금 넘으니, 한 번 체험해 봐도 밑질 건 없겠다. 


진격의 코끼리는 루아르 강변으로 향한다. 야외로 나오니 기계 섬 바깥도 온통 놀이터다. ‘저게 뭐지?’ 싶으면 높은 확률로 아트 피스다. 해양 회전목마와 대형 크레인, 19세기 배를 건조할 때 썼던 도르래까지. 몰락한 과거의 조각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니 예술이 된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결코 마구잡이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다는 게 느껴져 마음이 든든해진다. 

낭트의 보타니컬가든 호수에선 조각품도 휴식을 취한다
햇빛에 따끈하게 데워진 루아르 강변의 풍경

강변에 봄바람이 분다. 트램펄린 위로 아이들이 하늘을 난다. 대형 조각품 곁으로 소년의 보드가 질주한다. ‘도시를 재밌는 아트 플레이그라운드로 만들고 싶었다’는 낭트시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2027년에 기계 섬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완수할 예정이다. 35m 높이의 금속으로 된 나무 주위를 두 마리의 철조 왜가리가 순환 비행하는 작품이 나온단다. 그즈음 또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이 낭트를 뒤덮을지는 내 상상력 밖의 일이다.

진격의 자이언트 코끼리, 아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진격의 자이언트 코끼리, 아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올드 앤 뉴  
파리 Paris 

 

유에서 유


파리가 낯설다. 아니, 낯설어졌다. 벌써 4번째 방문인데 말이다. 지난  2년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파리에선 못 보던 스폿들이 야금야금 데뷔했다. 없던 건물이 뿅 생겼다기보단 기존에 있었던 역사적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새로운 명소로 탈바꿈시켰다는 표현이 맞겠다. 말하자면 무에서 유가 아니라 유에서 유의 변화다. 

유리 돔의 그림자가 피노 컬렉션의 천장화에 덧칠을 한다
유리 돔의 그림자가 피노 컬렉션의 천장화에 덧칠을 한다

파리는 보수공사에 진심인 도시다. 옛 형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공간으로 세련되게 메이크오버하는 데엔 파리만 한 능력자도 없다. 사마리텐 백화점(La Samaritaine)이 좋은 예다. 151년 된 유서 깊은 백화점은 장장 7년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작년 6월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픈과 동시에 백화점을 둘러싼 화젯거리들이 끊이지 않았는데(자국 대통령이 오픈식에 참석했다든가….), 그런 뉴스를 차치하고서라도 기꺼이 박수 쳐 줘야 할 부분은 바로 완벽에 가까운 복원이다. “꼭대기 층 유리 천장 아래 사면의 벽을 보세요.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공작새 프레스코입니다. 과거의 색상과 화려함이 온전히 되살려졌죠.” 가이드가 하늘을 가리킨다. 오후 2시, 백화점 하늘에 해가 들기 시작했다. 빛이 쏟아진다. 공작새가 날개를 편다. 한 번의 날갯짓에 카메라가 반응한다, 찰칵. 

사마리텐 백화점 꼭대기 층은 공작새의 색이다
사마리텐 백화점 꼭대기 층은 공작새의 색이다

다시 하늘을 봤을 땐 상인들이 배 위를 오르는 중이었다.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 유리 돔 위엔 다섯 개의 대륙 간에 일어나는 무역을 찬양하는 19세기 벽화가 새겨져 있다. 전문 복원팀이 몇 달 동안 땅으로부터 20m 떨어진 철근 위에서(!) 작업한 결과다. 피노 컬렉션도 파리의 브랜드 뉴 명소 중 하나다. 150년 넘게 파리의 상업거래소였던 곳을 3년간 쓸고, 깎고, 다듬어 작년에 현대미술관으로 공개했다. 케링 그룹의 회장인 피노의 보물상자를 열어 둔 격이라 작품 퀄리티는 두말할 것도 없고, 건축물 자체만 보고 와도 실망할 일은 없다. 하필 피노 컬렉션의 유리 돔 아래에서 카메라 메모리 카드가 터진 게 그를 증명한다. 

눈으로만 담기엔 턱없이 모자란 파리
눈으로만 담기엔 턱없이 모자란 파리

 

꼬몽 싸바?


새로운 명소에 눈을 돌리니 옛사랑이 그립다. 에펠탑은 잘 있나, 몽마르트르 트러플 피자집은 여전한가, 몽쥬 약국은 아직도 립밤을 1유로에 파나. 참, 노트르담은? 여행 내내 홍삼 즙을 달고 다녔어도 호텔 침대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안녕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옛것과 새것을 동시에 챙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파리가 대단한 이유!).

오후 5시, 몽마르트르 언덕에 햇살이 내려앉는 시간
오후 5시, 몽마르트르 언덕에 햇살이 내려앉는 시간

그날은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휘저으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꼬몽 싸바(Comment ca va), 잘 지냈냐고. 짧게 보고하자면 에펠탑은 여전히 예뻤고 몽마르트르 피자집은 줄이 더 길어졌다. 몽쥬 약국은 한국인 관광객이 뜸해진 뒤로 물량이 많이 안 들어온다고 했다. 립밤과 핸드크림이 약간 비싸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마음이 아프지만 부지런히 회복 중이다. 수술은 2년 뒤에나 끝난단다.

몽마르트르 트러플 피자집이 초심을 잃진 않았는지 확인하러 가던 길

반가운 마음엔 ‘에밀리’의 영향도 컸다(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 얘기다). 드라마 속 에밀리가 썸 타던 레스토랑, 에밀리가 다니는 회사, 에밀리가 조깅하던 공원을 차례로 돌았다. 에밀리 뺨치는 인증숏을 찍기 위해 쇼핑에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썼다. 결과는? 대만족. 후회는 없다. 나의 여행은 대체로 그런 식이다. 

그리웠던 이 시간, 미드나잇 인 파리
그리웠던 이 시간, 미드나잇 인 파리

마지막 날 밤. 에펠탑 앞에서 눈물나게 바삭한 크로아상을 삼켰다. 곧 어제의 프랑스가 될 풍경들.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확인받았을 때의 그 감동이란. 세상의 어떤 것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준다. 이제 보니 슬프고 지친 마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파리에 다 있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오랜만에 본 프랑스는 옛날 그대로던가? 묻는다면 글쎄. 나의 답은 O, X, △ 중 △다.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Travel info

▶INTERVIEW 

루브르 박물관의 줄이 짧아졌다
크리스토프 드클루(Christophe Decloux) 파리지역 관광청장

크리스토프 드클루(Christophe Decloux) 파리지역 관광청장
크리스토프 드클루(Christophe Decloux) 파리지역 관광청장

Q  파리의 현 코로나 상황은.

파리는 최근 90% 이상 정상화됐다. 주요 관광지와 호텔들도 전부 오픈했다. 4월 기준 파리 시민의 85%가 백신 접종을 완료했고, 3차 백신까지 접종하면 증상도 대부분 가벼운 감기 수준이다. 방역패스인 그린패스도 폐지됐다. 대중교통과 의료 시설을 제외하고는 마스크 착용 의무도 사라졌다.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은 권고사항일 뿐 필수는 아니다.


Q 추천할 만한 파리의 신규 관광지가 있나.

파리 근교에 일반에 개방하지 않았다가 최근 입장이 허용된 유명 화가들의 생가 3곳이 있다. 장 콕토 생가, 로사 보뇌르 성, 몬테 크리스토 성인데, 3곳 모두 방문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상태다. 파리 시내에서 신규 전시나 이벤트도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점! 아직 코로나 이전 수준만큼 관광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등 대부분 관광지의 줄이 짧다. 파리를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한 매력 포인트다.

브르타뉴 공작 성
브르타뉴 공작 성

 

▶IMMIGRATION PROCESS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4월 현재 백신접종완료자에 한해 별도의 PCR 검사 없이 프랑스 입국이 가능하다. 출국 전 영문백신접종증명서와 EU dPLF(승객위치확인서) 서류만 제출하면 프랑스에 도착해선 별도의 서류 확인 절차 없이 ‘초스피드’ 입국심사가 진행된다.

 

▶AIRLINE 

4월 기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천-파리 비행시간은 14시간 반으로 기존보다 2시간 가량 늘어났다. 그럼에도 희소식 하나. 다행히(?) 탑승객이 많지 않아 거의 모든 승객들이 ‘눕코노미(누워서 가는 이코노미 좌석)’로 비행할 수 있다. 에어프랑스가 인천-파리 노선을 주 3회 운항하고 있다. 

 

▶EXPERIENCE 

툿버스(TOOT BUS)  
파리가 처음인데다 일정까지 촉박하다면 답은 하나다. 툿버스에 올라타기! 단 2시간이면 친환경 버스로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등 파리의 주요 명소들을 둘러볼 수 있다. 자유로운 승하차도 가능하다. 

 

▶FOOD 

마카롱(Macaron)  
작고 동그란 모양의 머랭 사이에 필링을 채워 만든 쿠키. 프랑스에서 마카롱을 안 먹는다는 건 독일에서 맥주를 안 마시고 오는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젠 한국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원조는 확실히 다르다. 길거리의 아무 상점이나 들어가도 평타 이상의 맛을 선사한다. 

 

▶HOTEL 

호텔 머큐어 르망 센터(Hotel Mercure Le Mans Centre)  
건물 자체는 약간 낡았지만 시내와 가깝고 (의외로) 조식 퀄리티가 훌륭하다. 빵, 치즈, 잼, 버터류가 다양하게 구비돼 있어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주소: 19 Rue Chanzy, 72000 Le Mans


그랜드 호텔 드 라가르(Grand Hotel de la Gare Angers)
3성급 비즈니스 호텔의 정석. 앙제역에서 뛰면 30초 거리다. 캐리어가 무거워도 부담이 없다. 가격 부담도 없다. 다만 화장실은 160cm의 성인 여자에게도 매우 좁은 편.
주소: 5 Pl. de la Gare, 49100 Angers


맨션 드 몽드 호텔 앤 스위트(Maisons du Monde Hotel & Suite Nantes)
위치만으로도 일단 100점이다. 낭트 시내 중심에 있고 주변에 쇼핑몰, 맛집, 카페 등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쇼핑하다 두 손이 무거워지면 언제든 방에 짐을 던져 놓고 빈손으로 나올 수 있다.
주소: 2 bis Rue Santeuil, 44000 Nantes


파리 메리어트 오페라 앰배서더 호텔(Paris Marriott Opera Ambassador Hotel)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럭셔리의 연속. 대(大)자로 뻗어 누워도 공간이 남는 침대부터 그렇다. 아침을 거르는 타입이더라도 조식은 꼭 먹을 것. 8층 레스토랑의 뷰가 엄청나다. 
주소: 16 Bd Haussmann, 75009 Paris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프랑스관광청, 에어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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