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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을 길러낸 코발트 블루 '통영 예술 기행'

  • Editor. 서진영
  • 입력 2022.05.18 07:55
  • 수정 2023.05.30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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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림 같은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모델 포즈를 취하며 SNS 피드를 풍요롭게 할 기념사진을 남기거나 케이블카를 타고 푸른 바다 위로 아스라하게 흩뿌려진 섬을 구경하는 것은 기본값이 되어버린 것 같다. 


통영이 처음이 아니라면, 조금은 차분히 혹은 보다 깊숙이 통영을 느끼고 싶다면 ‘거장’을 좇아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글과 그림과 음악… 예술혼으로 통영을 그려내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통영이 그리워하는 근현대의 거장들을 곳곳에서 마주하게 될 테니.

●박경리의 ‘나의 살던 고향’

시작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 그가 태어난 동네가 세병관과 충렬사, 서피랑에 둘러싸인 간창골이다.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김약국의 딸들>에 이 간창골이 묘사되어 있는데, 박경리 생가로 가는 길목에 그 육필을 옮긴 표지석이 놓여 있다.

생가는 박경리 선생과 연고가 없는 개인 소유로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그의 글이 그때 그 ‘나의 살던 고향’을 떠올려 보게 한다. ‘성지라 할만한 지역이다’ 했던 옛 기운은 오간데 없다. 그러나 허구의 이야기라 하는 소설에서 시대상, 사회상을 발견하거나 유추해낼 수 있는 이유,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유치환의 <행복>, 김상옥의 <봉선화>가 꽃핀 거리

간창골에서 바닷가 강구안 방면으로 내려오는 길에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9행의 자유시. 우리는 왜 그렇게 시를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이상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은 시’라고 배우고 있는 그 시 말이다.

청마는 세병로 길가의 통영우편국 단골이었다. 생전 지인들과 주로 편지를 써 소식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편지 중에는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부친 연서도 있었다. 그 연서를 두고 로맨스다, 스캔들이다 의견이 분분한 것은 유치환이 기혼자였던 탓. 물론 둘 사이는 ‘플라토닉’으로 알려져 있으니, 통영중앙동우체국 앞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 시작하는 청마의 <행복> 시비가 세워질 수 있었으리라.

청마거리는 초정거리로 이어진다. 초정은 시조시인 김상옥의 호. 역시나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조 <봉선화>가 그의 대표작이다. 향남1번가라고도 부르는 초정거리 일대는 통제영 시절부터 줄곧 통영의 최대 번화가였지만 이제는 빈 상가가 더 눈에 띄는 원도심이다. 표석과 시비, 동상 정도가 예향의 예인들을 기리고 있는데 향후 통영시에서 이 일대를 특색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생된 근대문화유산, 통영시립박물관

초정거리에서 서호시장을 지나면 통영시립박물관이다. 통영의 역사와 관련 유물을 선보이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것 자체로도 들러봄직 한데, 1943년 통영군청으로 지어진 건물을 박물관으로 단장하여 근대문화유산 활용의 좋은 예로 손꼽힌다. 더하여 통영반, 통영갓, 통영 대발, 통영 나전 등 통영 장인들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공예품들을 보면 통영에 ‘예향’이라는 수식어가 공식처럼 덧붙는 것을 자연스레 ‘인정’하게 된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의 회향

노는 물이 달랐다고나 할까. 윤이상은 국내에 알려진 것보다 국제적 명성이 높은 예술가라 할 수 있다. 독일 공영방송 자이브뤼겐이 선정한 ‘20세기 100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이 선정한 ‘유사 이래 최고의 음악가 44인’ 가운데 그의 이름이 선명하다. 그러한 거장 윤이상이 이국 땅에서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대지의 따스함 속에 말입니다.” 하며 그리워한 곳이 바로 통영이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에도 파도 소리는 나에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나에게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 통영 시민에게 보내는 윤이상의 육성 편지 中

윤이상을 잘 몰라도 괜찮다. 통영시립박물관에서 150m 거리에 위치한 윤이상 기념관에는 선생의 생전 유품과 관련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차근차근 알아갈 수 있다. 기념관 곁으로 독일에서 거주하던 집의 거실과 서재를 옮겨놓은 베를린하우스와 야외공연장 등이 함께 기념공원으로 조성되어 음악과 어우러지는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으니 도보 여행객들에게는 더욱 반가운 공간이 된다.

 

●통영=코발트 블루 공식을 그려낸 전혁림

근래 통영의 봄날 가장 북적이는 동네를 꼽으라면 봉수골이지 싶다. 화사한 벚꽃길이 상춘객에게 손짓을 하는데, 그렇게 봉수골에 다다른 이들은 벚꽃 너머 봉수골의 참 매력을 알게 된다. 그 중심에 전혁림미술관이 있다.

중앙화단과 거리를 두고 고향 통영에서 자신만의 추상 세계를 그려나간 화가 전혁림. 통영의 바다를 소재로 특유의 청색조 ‘코발트 블루’를 구현한 그에게는 ‘한국의 피카소’ ‘바다의 화가’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미술관에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회화는 물론 도자, 목조 등 다양한 장르를 두루 개척한 그의 작품 세계가 고스란하다.

●책으로 곱씹는 통영의 예술가들

전혁림 미술관과 이웃한 봄날의책방은 출판사 남해의봄날에서 운영하는 작은 서점이다. 남해의봄날은 통영을 비롯하여 남해안의 풍부한 자연 자원과 문화예술 자원을 책의 형태로 풍성히 옮겨 담고 있는 출판사.

봄날의책방에서는 남해의봄날에서 펴낸 책과 함께 통영의 다채로운 문화예술 감성을 담고 있거나 통영 예술가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책,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별하여 전시·판매하고 있다. 때문에 통영 예술 기행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 박경리, 유치환, 윤이상 등 오늘 통영을 거닐며 마주했던 거장들을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또는 또 다른 관점으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가, 예향 통영! 통영 앞에 붙는 이 예향이라는 수식어는 지역을 홍보할 때 으레 붙이는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란 말씀. 언젠가 우리 근현대기 통영의 예술가들이 형 아우 구분 없이 우정을 나누고, 시대정신을 논하며, 서로의 작품 세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번뜩 ‘나는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는 친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에는 꼭 친구와 함께 여행을 다녀와야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통영을 다시 찾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글·사진 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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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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