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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그리고 세 개의 ‘피랑’ 이야기

  • Editor. 정은주
  • 입력 2022.05.26 06:00
  • 수정 2023.03.02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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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새빨간 동백꽃이 피어나고, 계단을 내딛을 때마다 피아노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어둠에 잠긴 숲 위로는 커다란 고래가 유유히 떠다닌다. 꿈 이야기냐고? 물론 아니다. 통영에 있는 세 개의 ‘피랑’ 이야기. 아, 피랑은 절벽이나 벼랑을 뜻하는 사투리다.  

●첫 번째 피랑, 원조 벽화 마을 동피랑

고깃배를 잔뜩 끌어안은 강구안 뒤쪽에 ‘동쪽 벼랑’인 동피랑이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아닐지라도 꽤나 경사진 것을 보니 순간, 또 올라야 하나?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어쩌랴, 원조이자 여전히 전국 제일의 벽화 마을이 이곳임을. 마음을 살살 달래며 걸음을 옮긴다. 어서 엘사와 울라프를 만나러 가보자고!

통영이 찐빵이라면 동피랑은 안에 든 팥소다. 통영 여행에 동피랑이 빠지면 뭔가 맹숭맹숭한 느낌. 그래서인지 통영을 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동피랑으로 향한다. 동피랑은 주기적으로 벽화들을 교체하기 때문에 몇 번을 가도 늘 새롭다. 그러기에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국 최고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일 테지. 

‘너의 마음을 낙지’, 낙지가 하트를 낚는 그림과 재치 있는 글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찾았더니 못 보던 새로운 벽화들이 가득하다. 높은 축대에는 통영의 역사와 문화, 예술이 담겼다. 새파란 바다를 닮은 골목을 지나 어깨에 날개도 달아보고, 못난이 삼형제와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언덕진 길도 가볍게 오르게 된다. 근데, 엘사 언니는 어디 갔지? 

강구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는 동피랑 최고의 포토 스폿이다. 주민인 듯 어르신이 반가운 눈인사를 건넨다. 옛적 삼엄한 감시 초소였을 동포루는 누구나 쉬어가는 사랑받는 쉼터다. 
 

●두 번째 피랑, 한 계단씩 곱씹어보는 서피랑

“동피랑이 있으니 서피랑도 있나요?”
웃자고 던진 질문에 ‘물론이죠!’라고 진지하게 대답한다면 다소 난감할 듯. 그러니 미리 알아두자. 통영에는 서피랑이 있다. 덧붙이자면, 아직까지 남피랑과 북피랑은 없다. 

동포루와 비슷한 서포루가 서 있는 언덕, 세병관의 서쪽에 있는 벼랑이라는 뜻에서 서피랑이는 이름이 붙었다. 서호동 뒤쪽 언덕 지대에 조성된 공원으로 동피랑과는 다른 감성을 입혔다. 언덕길을 오르는 99계단은 알록달록 색을 칠해 사진 찍기 좋다. 여기저기 재미난 조형물도 독특한 포토 스폿이 된다. 계단을 밞을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울리는 피아노 계단이 명물. 혼자서도 ‘학교 종이 땡땡땡’ 정도는 연주해 볼만 하다. 

무엇보다 서피랑에서 바라보는 강구안 일대가 절경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주변 섬들까지 한눈에 잡히는 풍경은 동피랑보다 훨씬 멋지고 근사하다. 이것만으로도 서피랑을 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서피랑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이 통영 출신 가수인 김성술의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것. 공원에 세워진 노래비에 원곡 가사가 적혀 있다. 

 

●세 번째 피랑, 밤에 빛나는 디피랑

 

도대체 디피랑이 뭐지? 이름만으론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이곳. 게다가 밤에만 갈 수 있다니. 가보고 나서야 알았다. 디지털(Digital)과 피랑을 결합한 독특한 합성어라는 걸. 디피랑은 동피랑과 서피랑에서 지워진 벽화들을 찾아 떠나는 스토리텔링형 미디어아트 전시로 당연히 해가 저물고 난 뒤에 문을 연다. 

어둠이 내리면 남망산공원은 낮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형광색이 번뜩이는 석상들 사이에선 당장이라도 도깨비가 튀어나올 것 같고 울창한 숲 속에 뿌려진 빛 세례는 눈과 귀를 홀리다 못해 마음까지 빨아들일 기세다. 환상적인 이 기분을 어찌 다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수밖에. 

디피랑의 하이라이트는 넓은 야외 공간에 펼쳐지는 미디어아트. 요즘 미디어아트 춘추전국시대라지만 야외에서, 그것도 숲에서 관람하는 미디어아트는 디피랑이 유일하지 않을까. 천정이 노출된 벽면과 바닥에 빛과 음악의 퍼포먼스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흩날리는 꽃잎에 파묻혀 있다가 순식간에 우주로 점프 업을 하고 동화 같은 디지털 세계에 풍덩 빠진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정지된 시공간에 갇힌 것처럼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 

관람 팁 하나, 동피랑과 서피랑의 벽화를 찾으려면 입장 전에 인터랙션 라이트볼을 구매해야 한다. 그럼, 이제 사라진 엘사를 찾아 떠나볼까?!

 

글·사진 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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