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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출사, 제주 한 컷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2.09.30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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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컷에 가을이 묻었다. 다음은 어디가 좋겠어, 카메라가 묻는다. 고심한 끝에 모범답안을 적었다.

●해변의 갈변
광치기해변

10월의 제주도는 갈변한 사과 빛이다. 눅눅하고 퍼석한데, 진득하다. 먹먹한 하늘과 채도 빠진 바다. 싱싱함은 덜해도 차분한 맛이 있다. 진짜 사과는 소금물에 담가 두면 갈변을 막을 수 있지만, 광치기해변에선 소용없다. 짠 바닷물이 날마다 물결쳐도 어김없이 해변엔 가을이 깃든다. 해 지는 시간엔 더더욱. 늦은 오후가 되면 갈색 용암 지질과 녹색 이끼, 현무암의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검은 모래가 동시에 검붉어진다. 삼색의 합이 잔잔하다. 단지 이름이 못생겼단(광치기, 광야처럼 드넓단 뜻이다) 이유로 여정에서 제쳐 둔 과거의 날들이 원망스러워지는, 해변의 갈변이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24-33

●아버지의 품속에서
아부오름

가을의 아부오름은 녹색을 벗고 갈색을 입는다. 오늘만 살 듯 쨍하게 초록색이던 나뭇잎들은 내일이 없을 듯 흐릿흐릿하게 빛을 잃는다. 둥근 산은 한가운데 타원형의 분화구를 이루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른이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아부악(亞父岳)’이란 이름이 붙었다. 아부는 제주 방언으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품속, 그 넓고 따뜻한 가슴팍에서 여행자들은 걷고 오르고 숨을 고른다. 노란솜양지꽃, 술패랭이꽃, 쥐손이풀 등 초지식물들과 화구 안에 자라난 삼나무들도 그 품 안에서 저물고 핀다. 저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란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아부오름을 줄줄이 칭송하는 지금의 문장들은, 존경과 존중의 마음으로 그에게 떨어 보는 나의 아부다.

주소: 제주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 164-1

●창조의 잔재 위
사계해안

SNS 속 세상은 두 세계로 나뉜다. 주류와 비주류, 인싸와 아싸, 메인과 서브. 사계해안은 굳이 따지면 후자다. 협재니 함덕이니 하는 잘 나가는 해변들의 블로그 리뷰 수가 만 개가 넘어갈 때, 사계해안은 고작 그의 1/10 정도. 그러나 사계해안의 바위 앞에선 이런 분류가 힘을 잃는다. 해안을 따라 늘어선 적갈색의 퇴적암층은 가을 햇빛을 받으면 채도가 두 톤은 짙어진다. 사진에 담으니 갈색 물감을 꾹꾹 짠 색깔이다. 생긴 건 마구 뭉쳐 놓은 찰흙 더미, 만들다 망쳐 버린 도자기와 닮았다. 창작자는 바람과 파도, 재료는 수천 년 전 인근 송악산에서 분출된 화산재다. 창조의 잔재 위를 가만히 걷다 보면 이런 생각에 확신이 든다. 예술의 가치는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에 의해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글·사진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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