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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도종환 - 느린 삶을 실천하는 부드러운 시인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6.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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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

가을 산 빛이 감도는 충북 보은 속리산 인근 산방. 시집 <접시꽃 당신>으로 잘 알려진 시인, 부드러우면서도 곧으며, 아름다운 서정과 굽힐 줄 모르는 지사적 면모를 가진 시인 도종환을 만났다. 아픈 몸 때문에 그렇게 애정을 쏟던 교단을 떠나 거처를 옮긴 그. 이곳에서 자연이 주는 소생과 치유의 힘 덕분에 예전보다 더 건강해졌다고 했다. 시인의 얼굴은 가을 햇살을 닮아 있었다. 

시인은 충북 청주 무심천 서쪽 운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국어교육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단다. 이후 교사이자 시인으로 삶을 살았다. 아내의 죽음, 해직과 복직 그리고 산방 생활의 체험이 그의 작품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동안 펴낸 시집으로는 <고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모과>, <사람은 누구나 다 꽃이다> 등이 있다.

속도를 늦춘 느린 삶

시인의 집은 속리산 자락 산길을 돌아들어온 양지마을에서 또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외딴 산중 숲 속의 황토집, “거북이처럼 느리게 느리게 오래도록 살라”는 뜻을 담은 구구산방(龜龜山房)이다. 산방 뒤 채마밭에는 누렇게 잘 익은 호박이 뒹굴고 있고, 실하게 여문 고추며 배추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뒤켠엔 장작이 수북히 쌓여 있고, 지나는 바람에 풍경소리가 청아하다. 마당에는 정갈하게 잔디가 깔려 있고 멋스러운 너럭 바위 사이 작은 연못이 이쁘다.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라니가 물을 마시러 찾아오고 산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내려온단다.  

“4년 전에 이 집에 들어왔어요.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후배가 요양차 지은 집이에요. 암 투병 중이던 후배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내가 들어와 살게 되었지요.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 산방에 처음 왔을 때는 외롭기도 하고 무서웠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그러나 글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경험이 어디에 있겠냐며 이곳에서 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았았다.” 최근에 발표한 시 <산경>의 일부분이다. 산과 물과 바람이 스스로 그러하듯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시인은 자연 속에서 참다운 생활을 누린 스콧 니어링, 소로우를 닮고 싶단다. 40대에 주류 사회에서 쫓겨나 버몬트 숲에 살면서 하루 4시간 노동, 4시간 지적 활동, 4시간 좋은 만남의 시간을 가진 스콧 니어링의 삶이 부러웠단다. “스콧 니어링은 검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노동으로 생계를 이루어 나갈 것, 원만하고 균형 잡힌 인격을 만들어 나갈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죠.” 시인은 그저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가는 삶이 아니라 속도를 늦춘 느린 삶을 살고 싶었던 거다.
시인은 이곳 산방에서의 체험을 산문집으로 낼 계획이란다. 또 시인이 발굴해 낸 천재 시인 오장환의 관련 자료를 정리해 책으로 낼 꿈도 가지고 있다. “오장환 시인은 휘문고등학교에서 정지용 시인에게 시를 배웠어요. 10대 후반부터 뛰어난 시적 재능을 보여서 천재 시인이라고 불렸죠. 19세 때부터 문학 동인 활동을 하고 시집을 냈는데,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고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월북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방 직후의 현실을 역사보다 더 잘 그려 내면서 해방 공간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인입니다.”


ⓒ트래비.

삶 자체가 여행

많은 문인들이 그러하듯 도종환 시인도 여행을 좋아한단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은 아픈 몸 때문에 많은 곳을 다니진 못했다고 한다. 지난 봄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을 출간하면서 인세 전액을 베트남 어린이들을 위한 평화학교 건립 기금으로 내놓기로 했다. 최근 베트남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건립과 관련해서 베트남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베트남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받아들여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난합니다. 전쟁의 기억과 아픔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전쟁이라는 아픈 기억이 있지요. 아직도 베트남에는 학교가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학교를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힘을 합친 거죠. 저도 그때 시집이 나와서 인세를 보탰죠. 올해 완공되고 내년에 개교합니다. 시집을 팔아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지어 주었다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시인은 삶 자체가 여행이라고 말한다. 낮선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 풍경은 언제나 가슴이 설레인단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곳에 가고 싶은 욕구 때문에 종종 길을 떠난다고. 얼마 전 순천 와온 바닷가에서 본 저녁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지는 해를 보면서 저무는 것에 대한 생각, 나이 듦에 대한 생각에 빠졌었죠.”그에게 있어 삶과 여행과 문학은 하나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라다크 지역을 여행해 보고 싶단다. “라다크는 우리 미래의 모습이 어때야 할까라고 고민했을 때 대안으로 떠오르는 곳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있는 평화로운 곳,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라다크라는 생각을 합니다. 싸움이 없는 사회, 욕심이 없지만 가난하지 않는 곳, 즐거운 노동이 있고 축제가 있는 곳이기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방 생활에서 몸은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고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단다. 전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느림’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는 시인. 조금 불편해도 느림으로 심신이 충만한 삶을 사는 시인이 부러웠다. 빠른 속도의 삶은 병든 삶, 느린 속도로 사는 삶이 건강한 삶, 조용하게 사는 삶이 거룩한 삶이라는 시인의 말이 오래도록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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