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박흥용 - 무미건조한 여행에서 돌아와 정겨운 감동을 그리다
만화가 박흥용 - 무미건조한 여행에서 돌아와 정겨운 감동을 그리다
  • 트래비
  • 승인 2006.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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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래비

어느 날 건네받은 박흥용의 <호두나무 왼쪽 길로>. 새로운 연재만화를 고민하던 중 심사숙고 끝에 고르고 고른 '작품'이었다. 많은 글씨와 그림으로 촘촘히 지면을 채우고 있는 일본 만화에 길들여진 세대에게 선 하나하나는 물론 심금을 울리는 여백까지 이 만화는 그 시작부터 색다르다. 네모난 작은 종이 속 작은 상자 안에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 장면을 연출하고 이처럼 정겹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마치 얼굴 모를 편지 친구와의 첫 만남을 기다리는 여고생마냥 박흥용과의 만남은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이윽고 나타난 그 사람.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헬멧 안에서 헝크러졌을 정리 안 된 머리, 가죽 자켓 차림에, 처음에는 까맸을 것이 분명한 신발은 희끗희끗 색이 바래 있었다. 터프한 외모의 이 사람이 그 섬세한 감성, 주옥같은 대사, 아름다운 스토리를 뽑아 낸 그 사람일 줄이야. 

하지만 박흥용과의 만남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런 ‘통념’, ‘편견’, ‘선입견’ 따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여실히 깨달은 시간이었다. 충만한 감성과 세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따뜻한 시선을 가진 ‘작가’를 보기 위해서 나는 필시 눈을 감았어야만 했다. 

오토바이에 빠진 여행마니아

“상복이는 마을 어귀에 있는 커다란 호두나무 아래서 서울로 돈 벌러 떠난 엄마를 기다립니다. 호두나무 위에서 들리는 기차소리. ‘저 기차를 타면 엄마가 있는 서울에 갈 수 있겠지.’ 호두나무 바깥 세상을 모르는 상복이는 기차소리를 따라 엄마를 찾아 나섭니다. 열아홉이 돼서야 엄마가 돈을 벌러 서울로 간 게 아니라 재가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복이는 ‘호두나무’를 불태우고 오토바이를 끌고 호두나무를 떠납니다. 상복이의 오토바이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왜 오른쪽도 아닌 왼쪽 길인가?”, “오토바이의 상징은 무엇인가?” 트래비에 연재 중인 만화 <호두나무 왼쪽 길로>. 작품에 대해 중구난방 궁금증 보따리를 쉴 새 없이 풀어 놓는 수다스러운 기자의 질문에 그가 말문을 연다. 

“오토바이부터 얘기해야 쉬울 것 같아요.” 어린시절 외갓집에 심부름을 가는 길. 동네 이장님이 태워 준 90cc 혼다 오토바이에 어린 박흥용은 흠뻑 빠져 들었다. 

“오토바이에 앉았을 때의 그 쿠션감, 얼굴을 스치던 바람, 저기 먼 산은 나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기분인데 옆으로 쉬익쉬익 지나가던 가로수의 속도감이 어린 저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죠.” 오토바이를 첫경험 하던 그때를 그림 그리듯 설명한다. 

그의 ‘첫 번째’ 여행은 15~16세 무렵. 오토바이를 훔쳐서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촌형한테 ‘말 안하고’ 오토바이를 빌려 인근 지역을 돌았다. 오토바이에만 탁 앉으면 동네, 마을, 도시를 한눈에 보는 것은 물론이고 땅을 밟고 지나는 그 느낌과 속도감까지도 너무 좋아 처음 예상과는 달리 기간이 길어져 버렸다.


 ⓒ 트래비
 
여행이 아니라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음악 마니아 중에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기에 빠진 사람도 있어요. 기기에 빠져 있다고 소리에 대해 문외한이거나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음악으로 치면 기기에 빠진 소리 마니아죠.”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나름의 ‘맛’이 있단다. 배가 고프면 오토바이를 멈추고 밥을 ‘얻어’먹는다. 처음부터 여행의 목적지를 정할수도 있지만 오토바이에서 내려 멈춰 선 그곳이 바로 여행의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지역의 유명한 음식일 수도 있지만 이름 없는 허름한 식당의 밥도 양만 뿌듯하다면 다 맛있죠. 맛있는 밥을 먹었던 여행지가 내겐 가장 좋은 여행지고 지금까지 어느 한 곳 나빴던 데가 없었어요. 다 좋았어요. 다 맛있었으니까. 그렇게 전국을 싸돌아다녔어요. 개처럼.”

차보다 더 많은 도로를 누빌 수 있는 오토바이를 이용했기 때문에 25만분의 1 지도에서 5cm 간격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줄을 그으면 횡과 종으로 샅샅이 모두 여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이전에 그가 돌았던 여행지를 차로 여행한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무미건조’한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요. 화려한 관광지에 요동하죠. 하지만 나는 무미건조한 여행지도 사랑해요.”

그가 말하는 ‘무미건조’한 여행이란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발굴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여행을 의미한다. 통일이 되면 남쪽에서 했던 대로 오토바이로 그곳을 여행하고 싶다. 그의 여행스타일 그대로, 아무 계획 없이, 길어지면 길어지는 대로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보아 주세요

그가 만화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뛰어난 만화가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어디에서 영감을 얻는 걸까. 

“굳이 말하면 독서에서 영감을 얻어요. 처음에는 공자, 맹자의 사상서를 읽었는데 29살 때,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과 <신의 아그네스>에서 감동을 받아서 성경을 지금까지 7번이나 읽게 됐어요.”

그림 그리듯 설명하는 박흥용의 심오하고도 재미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맨 처음 질문의 답을 얻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시 '왼쪽 길'에 대한 해답을 구했다. 공간 파악이 잘 안 되는 어린시절, 소년에게 호두나무 왼쪽 길은 외부와 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하고 가장 빠른 통로인 동시에 상복이가 기다리던 어머니가 온다면 그 왼쪽 길로 올 거라고 기대하던 길이기도 하다. 상복이의 일종의 GPS인 셈이다. 작품에 대한 상세한 감상과 분석은 독자들의 몫이다. 

“호흡이 너무 길어 안타깝지만 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셨으면 해요. 주인공이 경험한 것은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그려졌어요. 그 위에 드라마를 얹어 메시지를 더했고요. 바로 현장을 생생히 본다고 생각하며 읽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무미건조’하게 제 만화를 봐 주세요. 화려하지도 않고 많은 수식어도 없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무미건조’하게 읽어 나가 주세요.”

++ 박흥용의 여행

여행 노하우- 여행을 가면 말수가 적어진다. “밥 주세요”, “그 길이 어디에요?” 정도 외에는 말할 틈이 없으니까. 따라서 혼자 여행을 하며 외로움과 침묵의 묘미를 즐긴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길 위의 풍경은 ‘장날’ 풍경이다.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장날 풍경도 즐기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외로움도 떨쳐진다. 

기억에 남는 사람- 만화 속에도 등장하지만 거의 제정신 아닌 사람이나 노숙자들이 기억에 남는다. “외모는 나와 같더라고요.”(웃음) 박흥용 자신도 오토바이 여행을 하며 먼지를 홀랑 뒤집어쓰고 노숙하며 여행을 하는 터라 그들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고.  

여행의 의미- 여행은 영감을 받는 통로이기보다는 ‘환기’를 시켜 주는 계기. 마치 이사를 가면 모든 걸 정리하고 깨끗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을 얻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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