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인터뷰] 4,265km 길 위의 매직

트래비기자     작성일제302호(2017.04) 댓글0건
아프고 두려웠지만, 다시 일어나 걸었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던 그 길 위에선 가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김희남(트레일 닉네임 ‘히맨’)
4,265km 미국 장거리트레일 PCT 완주자
홈페이지: he-man.me
브런치  brunch.co.kr/@he-man
유튜브  www.youtube.com/whi2hn
 

비록 길을 헤맬지라도

3년 전, 길을 잃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눈앞이 깜깜했다. 뭘 해야 할까, 뒹굴뒹굴 집에서 페이스북을 뒤적이던 히맨*은 우연히 <와일드WILD>라는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가 4,000km가 넘는 미국 PCT*에 도전했던 기록을 고스란히 담은 내용이었다. 이후 얼마간 책에 푹 빠져 살던 그를 결정적으로 부추긴 건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다. “나를 잘 알게 되었어요.” <와일드>의 저자이자 여성 PCT 완주자인 셰릴의 한마디에 히맨은 결심했다. ‘도전하자.’ 그렇게 그는 PCT에 올랐다. 2015년 4월 16일의 일이었다.

1일차. 여정을 시작한 지 15분쯤 됐을까. “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 국경 순찰 차량에 타고 있던 경비원이 고래고래 외치며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시작부터 길을 잃었다. 그 이후에도 수없이 길을 헤맸지만, 히맨은 해맑았다. “걷기 시작 후 한 달은 꼭 멀리 캠핑 온 것 같아서 얼마나 신났었는지 몰라요.” 고프로(GoPro)*로 사진을 찍고, 매일 일출과 노을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워낙 어디서든 잘 자는 히맨에겐 야외 침낭 속마저 불편하기는커녕 포근하고 아늑했다. 그런데 몇 달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솔직히 지겨워졌단다. 평소 마라톤을 즐기는 그였지만, PCT는 차원이 달랐다. 

“42.195km 풀코스 마라톤을 100회 정도 완주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요.” 걷고 또 걷는 과정을 반복하는 게 더 이상 신나지 않았다. 계속해야 할 이유조차 희미해져 갔다. 지루함을 이겨 낸 비결을 묻는 질문에 히맨의 답은 아주 엉뚱했다. “맥도날드.” 지친 그를 계속 걷게 한 건 뜻밖에도 PCT 길 표식에 표시된 맥도날드 사인이었단다. “멋있는 풍경도 좋았지만, 맥도날드에 도착하는 날이 훨씬 더 행복했어요.” 이따금 방향을 잃었지만, 히맨은 해맑음을 잃지 않았다. 
 
*고프로│하이킹, 라이딩 등 아웃도어 활동시 사용하는 액션 캠 카메라
 
1 PCT 완주자에게만 수여되는 메달. 사전에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받을 수 있다 2 뒤처진 동행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적어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는 용도로 사용한 제로그램 현수막. 그리고 PCT 여정을 함께한 5켤레의 트레킹화
 
PCT와 히맨

*PCT |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Pacific Crest Trail)은 아팔란치아 트레일(Appalachian Trail), 콘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Continental Divide Trail)과 함께 미국의 3대 장거리 트레일 중 하나다.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미국 서부를 지나 캐나다 국경을 넘는 약 4,265km 길이로, 트레일러에 따라 다르지만 완주까지 보통 4~6개월 정도 소요된다.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미국 3개 주를 통과하며 이중 캘리포니아주가 절반을 차지한다. 

*히맨 | PCT 위에서 참가자들은 실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트레일 네임을 사용한다. 스스로 이름을 짓기도, 다른 하이커들이 지어 주기도 하는데 ‘히맨(HE-MAN)’은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하이커 부부가 김희남씨에게 지어 준 이름이다. 걷는 모습이 씩씩하고 빠르다며. 히맨이라는 단어는 1983년에 등장한 만화 <우주의 왕자 히맨> 이후 쓰이기 시작했으며, ‘건장한 남자’를 의미한다.
 
캘리포니아 남부 하이커 타운 부근. 길을 잃지 않으려면 표식을 잘 따라가야 한다
텐트를 허용하지 않는 오리건주 크레이터 레이크(Crater Lake) 국립공원에서는 비박을 해야 했다
 
 
길 위에서 일어난 마법

반년 동안 길 위에서 먹을 식량을 모두 지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 “PCT에서는 재보급 방법을 활용해요. 출발 전에 미리 재보급 상자를 각 재보급지 우체국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남은 거리를 계산해 4~5일 단위로 나눠 또 다른 재보급지로 보내는 방식이죠.” 아무리 식량을 분산해 꼼꼼히 준비한다 해도, 물론 집밥 같은 식사를 기대하긴 어렵다. “아침에는 또띠아에 잼을 발라 먹거나, 우유 파우더에 물을 부어 시리얼과 함께 먹었어요. 점심은 초코바나 에너지바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저녁엔 밥을 지어 고추장과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었죠.” 하지만 견딜 만했다. 길 위에선 가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트레일 매직(Trail Magic)’이란 길 위에서 받는 예상치 못한 도움을 말한다. 이미 그 길을 거쳐 간 하이커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음식이나 장비 등을 다음 하이커들을 위해 놓고 간다. 불필요한 무게를 덜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다음 하이커들을 위한 깜짝 이벤트이기도 하다.

히맨이 경험한 첫 번째 매직은 사막 위에서였다. 그늘 한 점 없는 약 20km의 사막구간을 걷는 동안, 물 한 모금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러던 중 새하얀 박스 두 개를 발견했다. 얼음으로 채워진 상자엔 탄산음료와 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말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였죠!” 마법은 계속됐다. 173일째, 재보급을 받지 못한 채로 10일 가까이 걷던 히맨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였다. 따끈한 핫도그와 감자를 들고 다음 하이커를 기다리고 있는 트레인 엔젤(Trail Angel)*을 마주친 게 아닌가. 식량이 동난 히맨에게 남는 식량까지 챙겨 주던 그는 진정한 천사였다. 

*트레일 엔젤│트레일을 걷는 하이커들을 도와주는 사람. 때로는 음료, 간식, 집 등을 하이커들에게 무료로 제공해 주기도 한다.
 
트레일 엔젤이 공급해 주는 급수 포인트. 이름과 급수량을 적는 로그북이 들어 있다
멀리 보이는 워싱턴주 레이니어(Rainier)산. 트레일이 산맥을 따라 뻗어 있다
 
 

버티다, 다시 걷다

“곰을 만난 적도 있어요.” 숲속이나 사막을 걸으면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에 히맨은 곰 이야기를 꺼냈다. 시에라모레나(Sierra Morena)산맥부터 요세미티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Park)까지는 자칫하면 곰을 마주칠 수도 있는 험한 구간이다. “야생 곰을 3번 정도 봤는데, 다행히 모두 사람을 무서워하는 곰이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어요.” 무시무시한 이야기에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이런 그라서 이런 여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장장 4,265km을 6개월 동안 걷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마지막 30일이 너무도 힘들었어요.” 왼쪽 발목이 붓기 시작했다. 동행과 페이스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걷기가 힘들었다. “동행자와 속도를 맞추려고 아침마다 몇 시간씩 일찍 일어나 먼저 출발하곤 했어요. 하지만 역부족이었죠.” 야생 곰의 위기도 거뜬히 넘긴 그였건만, 퉁퉁 부은 발목을 부여잡고 간신히 진통제로 연명하며 잠을 청해야 했던 밤들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진통제 부작용으로 손발이 저려 왔다.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자, 이러다 발을 영영 못 쓰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병원에 가는 일이 급선무였지만 PCT 완주를 약 320km을 남겨 둔 시점이었다. 비자 만료도 10일이 남은 상황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조금씩, 다시 걸었다.
 
캘리포니아 북부는 대부분 우거진 산과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다른 길을 향해

완주 후 뭔가 거창한 게 생길 것 같았지만, 막상 그렇진 않았다. 그러나 <와일드>의 저자 셰릴의 말처럼, 자신을 더 잘 알게 됐다. “미래의 대한 뚜렷한 계획이나 인생의 정답은 찾지 못했어요. 대신 인생에 대한 가치와 신념이 더욱 견고해졌죠.” 히맨은 평생 가슴 뛰고 설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발목도 다치면서 개고생하는데도 허허 웃으면서 걷고 있더라고요. 남들과 다를 뿐이지 틀린 길은 아니구나, 확신이 들었죠.” 귀국 후 히맨은 장거리 트레킹 경험을 기반 삼아 ‘앨리스맵(AlleysMap)’이라는 위치 기반 동영상 서비스를 지원하고 관련된 스타트업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PCT의 경험을 공유하는 강연회도 기획하고 있다고.

“모든 걸 기록하세요.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형식에 상관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록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트레킹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히맨의 당부다. 기쁨, 슬픔, 우울함 등 길 위에서 만난 감정들, 함께했던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눈에만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아쉽다며. 앞으로 또 트레일 종주 계획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언젠가 미국 중부 콘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PCT는 끝났지만, 히맨의 종주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Pacific Crest Trail
길 위의 당신을 위한
PCT Guide
 
▶하이커라면 꼭 알아야 할 PCT 용어

스루 하이커(Through Hiker)│장거리 하이커. 보통 1,600km가 넘는 트레일을 걷는 하이커를 말한다.

제로 데이(Zero Day)│트레킹을 하지 않고 쉬는 날. 하이커들은 마을에 들러 재보급을 하거나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요요(Yo Yo)│한 방향으로 트레일을 완주한 후, 다시 되돌아 같은 길을 한 번 더 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 함량 200% 
히맨이 전수하는 PCT Tip

①현지 마을에서 식량 조달시, 마트에 있는 ‘하이커 박스Hiker Box’에 주목하자. 하이커들이 불필요하거나 남은 음식들을 넣어 놓는 박스다.  

② 자기 전 플라스틱 물통에 뜨거운 물을 채워 침낭에 넣고 잘 것. 고도가 높아 추운 산에서 침낭 속 온도를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
 

③ 우체국에서 재보급 상자를 부칠 때 상자의 사방에 ‘PCT HIKER’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쓸 것. 상자를 신속하게 찾을 수 있을 뿐더러, 우체국에서 특별히 PCT 하이커들을 위해 장기보관을 해 주기도 한다.
 

 
▶그들이 길을 걸은 이유
PCT를 주제로 한 책
 
와일드 Wild
셰릴 스트레이드 저 | 우진하 역 | 나무의 철학 | 2012
아버지의 학대, 어머니의 죽음, 뿔뿔이 흩어진 가족, 이혼까지 26세의 젊은 나이에 인생의 위기감을 느낀 저자가 홀로 미국 PCT에 도전한 모든 기록을 담은 책.
 
4,300km-175일간 미국 PCT를 걷다
양희종 저 | 푸른향기 | 2016
한국 최초로 PCT를 다룬 책. 히맨과 함께 PCT를 종주한 양희종 저자가 당시 서른 살의 나이로 175일 동안 걸었던 하이킹 에피소드들을 담았다.
 
 
글 Traviest 구도영 사진 Traviest 구도영, 김희남 에디터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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