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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범관광 특별기고 - 멀고도 가까운 그곳, 개성을 가다 "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6.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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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겨우 눈을 떠서 부랴부랴 채비를 갖추고 경복궁에 도착한 시간은 5시 20분.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경복궁 주차장에는 불빛을 환히 켜놓은 대형버스들과 벌써 도착해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내외신 취재진과 관광객들로 어수선했다. 모두가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개성땅을 밟아본다는 설레임으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틀간 비가 그렇게 퍼붓더니 오늘은 쾌청한 초가을 날씨로 화답했다. 2005년 8월 26일 금요일 아침 6시15분경 드디어 500명을 태운 14대의 버스가 출발했다. 잘 다녀오라는 현대아산 임직원들의 손 흔드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그리고 50여분만에 남측 도라산 출입사무소에 도착했고, 새로 건설중인 남측 경의선 CIQ(출입국사무소)건물과 도라산 역사가 보였다. 여기서부터 거치는 모든 절차는 금강산관광 출입국절차와 거의 동일하다. DMZ를 지나고 8시25분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필요한 수속절차를 마치고나서 북측 동승안내원 2명을 태운 버스는 정확히 9시가 되자 개성시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고려태조 왕건이 터전을 삼았던 송악산(해발 489m)이 보였다.

북측 출입사무소부터 개성시내까지는 불과 11km. 이미 잘 닦여진 도로를 달리는 버스 차창밖으로 개성공업단지가 먼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벤에셀, 리빙아트, 로만손시계, 한국토지공사, 우리은행, 패밀리마트 등 익숙한 우리 기업들의 이름이 새삼 반가웠다. 1단계 건설규모가 100만평이고 향후 2000만평까지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는 공단의 규모도 크지만, 여기저기서 일을 멈추고 손을 흔들어주는 인부들과 중장비들이 뭔가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대사를 앞당기고 있다는 가슴 뭉클함을 전해준다.

곧 버스가 개성시가지로 진입하면서 가옥들과 여러 가지 구호를 붙여놓은 건물들 그리고 북한주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탄동상점’, ‘동현 리발관’, ‘천연색 세거리 사진관’, ‘미용원’, ‘과실-남새(채소)’, ‘책방’, ‘식료품’ 등등 한글입간판들이 보였고, ‘3대혁명 붉은기챙취 전투장’이란 건물 명칭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후대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자’, ‘조선은 하나다’ 등등 붉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새겨진 구호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이미 언론보도 등을 통해 접해온 터라 그 모습들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본다는 것은 남측의 관광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아쉽게도 시내풍경이나 주민들의 모습을 촬영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돼 있지만 이것은 금강산관광과는 또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한정된 공간내에서 자연경관을 위주로 즐기는 금강산관광에 비하면 개성관광이 더 경쟁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시의 면적은 1,308.6㎢으로 서울의 두 배가 넘지만 인구는 40만명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거리는 전체적으로 한산했지만 중심가로 접어들수록 큰 건물과 심지어 고층아파트들도 나타났고 유동인구도 제법 많았다. 차량은 드문 편이었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주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도시 전체가 무척 깨끗하고 잘 정돈돼 있었고 하천에 흐르는 물도 아주 맑다.

처음 도착한 관광지는 ‘고려박물관’이었는데 고려시대 최초의 교육기관 ‘성균관’인 것이다. 주차장내에 위치한 ‘고려기념품상점’-개성인삼이 역시 대표상품이다-을 지나 입구 안뜰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한 그루씩 서있는데 각기 이름이 ‘성균관 은행나무’, ‘성균관 느티나무’라 적혀있다. 전시관에는 고려시대 유물 1천여점이 전시돼 있는데 특히 고려청자가 많이 비치돼 있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한 점과 직지심경(1377년)이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이방원의 수하들에게 포은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였다. 실제로 교각의 돌 주변에는 혈흔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오랜 세월 후에도 어떻게 남아있는지 과학적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선죽교를 건너기 전에 오른편에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서있는데 각각 ‘선죽교(善竹橋)’와 ‘하마비(下馬碑)’라 새겨져 있다. 교각 건너편에는 정몽주의 충정을 기린 ‘표충비’가 있다.
이어서 방문한 곳이 ‘숭양서원’으로 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그의 옛 집터에 세운 조선시대 서원이다.

이번 관광답사에서 눈에 띄는 특이한 점은 유적지마다 돌판 위에 역사적 배경 설명을 새겨 넣은 안내판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북측 CIQ내에 있는 무관세매대(면세점)를 포함해서 가는 곳마다 기념품 상점이나 판매대가 설치돼 있고, 판매원들이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매우 상냥한 태도로 물건을 파는데 미국달러만 받는다. 예컨대 초록색 플라스틱병에 담긴 ‘모란봉 레몬 탄산단물(사이다의 일종)’ 한병에 1달러, 개성인삼 한 세트에 40달러 정도다. 그리고 화장실이 깨끗하고 도로나 인도도 모두 잘 단장돼 있었다. 많은 준비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점심식사는 인원이 많은 관계로 네 곳으로 나눠야 했는데 필자는 ‘자남산여관’에서 식사를 했다. 개성의 유명한 ‘11처 반상기’를 개별적으로 받지는 못했지만 그에 해당하는 정갈한 음식들이 11가지가 넘게 풍성하게 나왔다. 북측 안내원 설명에 의하면 그중에서도 ‘약밥’과 ‘우메기(기름에 튀긴 떡요리)’가 으뜸가는 개성특산음식이라고 소개한다. 북한의 맥주 ‘봉학맥주’, 소주 ‘령통술’, 생수 ‘고려 신덕산 샘물’ 등도 함께 나와 북한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이날 관광코스의 마지막은 ‘박연폭포’였다. 화담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질 만큼 물줄기의 높이와 크기가 장엄하고 수량이 풍부한데다가 맑기가 그지없으며 주변 풍광 또한 수려하다. 폭포에서부터 왕복 한 시간 거리에는 고려시대 창건된 사찰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박연폭포 앞에서 다시 남쪽을 향해 출발한 시각은 오후 3시20분. 개성공업단지까지 20km. 올 때와 똑같은 절차를 반대로 되풀이하면서 서울 경복궁 앞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20분경으로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새벽부터 움직였던 탓인지 피로가 밀려왔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개성관광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실제 북한 도시의 거리와 주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연변족이 아닌 북한 종업원이 직접 제공하는 북한음식을 맛볼 수 있고 그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감동스러울 만큼 체험적 가치가 컸다. 개성시내의 유서 깊은 역사문화유적도 빼놓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글 사진 = 주상용 한국관광공사 사업홍보관리실 과장 syzhu3@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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