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박준의 교토 스토리④ 홍운의 간(紅雲 의 間)에서 보낸 하룻밤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9.05.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번 호로 4회에 걸쳐  진행했던‘박준의 교토 스토리’를 마무리합니다. Travie writer 박준은 여행과 사람을 들여다보는 그만의 깊이 있는 시각으로 줄곧 흥미로운 여행 이야기를 더불어 나누고 있습니다. 그가 지은 책으로는 <On the Road>, <네 멋대로 행복하라>, <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등이 있습니다.

홍운의 간 (‘紅雲 의 間’)에서 보낸 하룻밤

_도케쓰테이 료칸 渡月亭 旅館

너무 비싸서 얼마라고 쓰지도 못하겠다. 그렇다고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비싼 것도 아니다. 교토 가이세키 요리로 준비되는 성대한 디너와 일본 스타일의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게 비싼 요금의 한 가지 이유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하룻밤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기왕에 이곳에 묶을 거라면 정원에 온천탕이 있는 방을 선택할 것. 다른 방에도 실내에 나무 욕조는 있지만 노천 온천은 아니다. 정원에 온천이 있는 방은 ‘Room Type 2’뿐이다. 
도케쓰테이 료칸에는 전부 25개의 방이 있고 온천도 있다. 체크인은 4시, 체크아웃은 10시다. 일본의 다른 숙박시설도 그렇지만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예약을 취소할 때는 취소비(cancel charge)를 내야 하는 것도 일본에서는 상식이다. 심지어 일주일 전에 예약을 취소해도 20%를 공제한다. kyoto-ryokan.blogspot.com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좋았다
“내가 여기에 오려고 교토에 왔구나”


달을 건너 이르는 곳, 도케쓰테이 료칸 

한큐 오미야역에서 JR이 아닌 한큐를 타고 교토의 외곽 ‘아라시야마(嵐山)’로 향한다. 캐리어를 들고 기차에 올라서일까? 마치 교토를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느 사이 일주일이 지났다. 기차를 타고 창밖의 스치는 풍경을 보니 새삼 교토가 커 보인다. 세상 어느 곳을 가도 참 많은 사람이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또 다른 풍경을 만나러 난 지금 교토의 북서쪽 아라시야마로 간다.

특급이 아닌 보통 기차의 맨 앞 칸에서는 창 너머로 기관사의 모습이 보인다. 일본의 보통 기차는 우리나라 지하철과 비슷하지만 객실에서 운전석이 보인다거나 달랑 한 개 또는 두 개짜리 객차를 가진 기차가 많은 게 다르다. 기관사는 작은 운전석 칸에서 혼자 운전을 하고, 신호를 주고받는 손짓을 하며, 안내 방송을 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철로를 따라 몸을 맡긴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기차를 타면 늘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정이 정신없을 때 기차를 타면 습관처럼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내 직업이 부럽다고 하지만 여행을 하며 글을 쓰는 게 일이 되어 버릴 때 여행은 즐겁지 않다. 언제나 그 경계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심지어 ‘여행을 즐겨야 한다’는 우스운 강박에 휩싸인다. 그때 여행은 완전히 일이 되어 버린다. 조금 과장하자면 여행을 즐길 수 없는 게 고지식한 여행작가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한큐 아라시야마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니 ‘도케쓰 다리(渡月橋)’다. ‘도월교’란 이름 그대로 ‘달을 건너는 다리’다. 오늘 내가 묶을 ‘도케쓰테이 료칸(渡月亭 旅館)’이 바로 이곳 강가에 있다. 3층짜리 건물인데 내 방이 3층이라고 한다. 전망이 좋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과 거실이 분리되어 있고 거실 바깥에는 정원이 있다. 그것도 손바닥만한 정원이 아니라 제법 넓다. 생각지도 못한 ‘3층의 정원’이다. 정원의 코너를 도니 두 사람이 들어가면 딱 좋을 것 같은 작은 온천탕까지 놓여 있다. ‘만세!’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번에 교토를 여행하면서 가장 호사스러운 숙소다. 내 방의 이름은 ‘홍운의 간(紅雲의 間)’. 

달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붉은 구름 사이에 놓인 방에 도착한 것이다. 정원에 서서 고개를 돌리니 산과 강이 보이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도 보인다. 강 쪽으로 가파르게 경사진 산이 강물에 비치고 도케쓰 다리 위로 자동차와 함께 인력거도 오간다. 그저 관광객을 태운 것이지만 인력거는 아라시야마의 풍광과 잘 어우러진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이 다를지라도, 포장도로는 아닐지라도 아마 지금 바라보이는 아라시야마의 풍경은 몇백년 전과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만큼 아라시야마는 적요한 산과 강에 둘러싸였다. 이곳에 귀족들의 별장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잠시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 해가 져 가는 시간, 어느 사이 도케쓰 다리 위로 불이 들어온다. 가로등이 아니다. 길 위로 작은 등불이 놓였다. 마치 누군가 내 앞에서 길을 밝히며 나를 인도한다. 

그 밤의 풍정(風情)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유카타를 입고 성대한 만찬 같은 교토 가이세키 요리로 준비된 저녁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좋았다. “내가 여기에 오려고 교토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칠 정도다. 그날 밤 온천탕과 방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나왔으면 그 다음에 할 일은 한 가지다. ‘후톤’이라 불리는 폭신한 이불에 몸을 누이는 것.

다음날 아침, 어제 내가 도착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룸서비스를 맡아 준 ‘아유미’가 마지막으로 아침식사를 준비해 준다. 그녀는 시애틀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이제 체크아웃할 시간이다. “이곳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유미가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한다. 우아하고 단아하다. 나야말로, “정말 고마웠어요”라고 인사를 하고 싶다.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1 도케스테이 료칸의 아침식사 2 도케쓰테이 료칸 3층 객실의 정원 3 관광객이나 탈 것 같은 인력거는 아라시야마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4 저녁식사를 마치면‘후톤’이라고 불리는 이부자리를 깔아 준다 5 도케쓰테이 료칸 3층에서 보이는 도케쓰 다리의 모습 6 덴류지의 정원은 세계문화유산이다 7 약국에서 만난 사치코상과 그녀의 딸, 유리




아라시야마, 벚꽃을 볼 수 없어도 괜찮다

도케쓰테이 료칸에서 오이가와강에 걸려 있는 다리를 건너 5분 정도 걸으면 덴류지(天龍寺)다. 정원이 아름다운 곳. 내게는 가이드북에서 본 액자 속 그림 같은 정원의 풍경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내가 본 사진의 정원이 단풍에 붉게 물들어서인지도 모른다. 3월의 덴류지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모습 대신 연못과 어우러진 신록이 싱그럽다. 

덴류지의 북쪽 문으로 나가면 대나무 숲 사이 오솔길이 나온다. 교토를 소개하는 사진에 자주 나오는 곳이다. 대나무 숲길이 ‘노노미야 신사’를 둘러싸고 있다. 노노미야 신사는 연분을 맺어 준다는 신으로 유명한 곳.

교토의 많은 곳이 그렇지만 아라시야마(嵐山)도 이 동네에 사는 것처럼 배회하기 딱 좋다. 강이 있고 좁은 골목이 있는 작은 동네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골목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친절하고 정겹다. 약국에서 만난 ‘사치코상’과 그녀의 딸 ‘유리’도 그렇다. 약사인 엄마와 딸인 유리는 친구 같다. “어, 아저씨, 아까 만났었는데…” 유리가 나를 아는 체한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철길 앞에서 내가 길을 물어 본 아가씨다. 그때는 유리가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유리는 약대 1학년생, 얼마 전 한국에 다녀왔는데 호떡이 참 맛있었다는 얘기부터 꺼낸다. 사치코상 가족은 올해 여름에 다시 한국에 올 것이라고.

‘아카네’라는 일본 친구는 내가 벚꽃이 피기 직전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정작 난 하나도 아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벚꽃이 만개한 풍경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볼 수 없어도 괜찮다. ‘다음이 기약되어서’라거나 쿨한 척하느라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래도 괜찮아, 무조건 그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뿐이다. 어차피 다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카네는 축축 늘어져 있지만 손톱만큼도 싹트지 않은 덴류지의 벚꽃나무 사진을 보며 이게 뭐냐고, 벚꽃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내가 불쌍하다고 깔깔거렸지만 나로서는 그 모습도 아름다웠다. 인파로 북적이는 덴류지의 만개한 벚꽃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한가한 덴류지도 나쁠 게 없는 것이다.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