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ESSAY] 분실물-그래도 왠지 고맙잖아

  • Editor. 고서령
  • 입력 2014.02.27 14: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야.” “난 참 운이 좋아.”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치고 건망증이 심하지 않은 이를 거의 못 봤다. 시도 때도 없이 물건을 잃어버리는데 그중 8할은 마음씨 좋은 사람들 덕에 되찾으니, 그때마다 세상은 아름다워 보이고 자신은 큰 행운을 타고난 사람인 양 느껴지는 것이다.
 
실은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만일 가장 진실한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면 ‘특기’ 란에 
‘물건 잃어버렸다가 되찾기’라고 
써야 할 거다. 
 
버스에 놓고 내린 지갑, 택시에 실려 보낸 스마트폰, 지하철 선반에 올려놓고 내린 도서관 책, 심지어 인천공항 벤치에 덩그러니 버려두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몰랐던 카메라(이건 정말 심각했다)까지도, 99.99%의 확률로 되찾는 신공을 발휘해 왔다. 물론 경기도 끝자락에 있는 버스종점이나 생전 가본 적 없는 동네의 파출소 같은 곳들을 찾아다니느라 고생깨나 했지만.

이렇게 덜렁대는 나도 해외 출장지에서만큼은 정신줄을 바짝 붙잡는다. 해외 출장 중엔 분실물 습득자의 연락을 받기도 어려울 뿐더러 정해진 일정에서 이탈해 물건을 찾으러 가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천성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 했던가. 결국 태국 출장에서 일이 터졌다. 출장 일주일 전, 수년 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이별했다. 슬픈 기억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서울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도망치듯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태국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로 나를 위장해야 했다.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었고, 일을 하는 중이었으므로. 그러는 동안 마음속에선 돌보지 못한 상처가 계속 곪아 갔다. 

건망증이 더 심해진 건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코끼리 무늬 바지를 사러 들어간 옷가게에 지갑을 놓고 나오고, 겨우 지갑을 되찾은 지 30분도 안 돼 신발가게에 카메라를 두고 나오는 식의 위기가 줄을 이었다.

방콕의 왕궁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 걸친 가방에 툭! 하는 접촉이 느껴졌다. 순간 등줄기에 느껴지는 서늘함. 가방을 확인하니 스마트폰이 없었다. 소매치기였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지만 인파 속에 작정하고 숨어들었을 범인을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불과 6개월 전 100만원에 가까운 거액을 주고 할부로 구입한 새것이었는데. 눈에 띄는 곳에 스마트폰을 넣어 둔 채 넋 놓고 서 있던 내 잘못이 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갖고 있던 모든 소지품을 쏟아 확인했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잃어버렸음을, 영영 찾을 수 없음을, 
이제 그것은 나의 물건이 아님을 받아들였을 때, 
가슴 속 상처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됐어.” 
 
잃어버린 물건은 이별한 남자친구와의 ‘커플폰’이었다. 그 속엔 내가 몇 번이나 시도하였지만 차마 지울 수 없었던 그와의 사진, 대화, 추억들이 가득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이것들을 싹 다 지워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고맙게도 소매치기범이 그 역할을 해 줬구나.

출장에서 돌아온 뒤, 남은 할부금 79만원과 새 휴대폰 대금을 내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스마트폰 보험과 여행자 보험에 가입돼 있었지만, 폴리스리포트를 챙겨오지 않아 한 푼도 보상받지 못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태국에서 이런 황당한 일을 당했노라며 미지의 소매치기범을 실컷 욕해 주었다. 그때마다 출장 전보다 많이 가벼워진 마음이 내게 속삭였다. “그래도 왠지 고맙잖아.”  

글  고서령 기자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