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휴게소 야구연습장
[ESSAY] 휴게소 야구연습장
  • 김선주
  • 승인 2014.03.27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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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그런 식으로 엇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또 어떻게든 서로 연결돼 있어 거리나 공간의 차이는 별로 중요치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당시, 그러니까 1994년 무렵은 그렇지 않았다. 무선호출기, 일명 ‘삐삐’가 유선전화기 이후 가장 진화한 통신수단이었다. 일종의 문자서비스인데 숫자만 보낼 수 있다는 게 한계였다. 상대의 삐삐에 자신의 유선 전화번호를 보내 전화를 하도록 호출하는 방식이었다. 숫자를 조합해 의사소통을 하기도 했다. 82는 ‘빨리’였고 54는 ‘오빠 사랑해’, 18은 뭔가 화가 잔뜩 났을 때 사용하는 식이었다. 1004(천사), 1010235(열렬히 사모해), 0404(영원히 사랑해), 0027(땡땡이 치자) 등 기발한 숫자약어가 삐~삐~ 떠들어댔다. 그날 내 삐삐는 호들갑스럽게 8255를 연달아 뱉어냈다. 빨리 오라는 재촉이었다. 
 
공짜로 얻은 티켓이라고는 하지만, 이성 친구가 
둘만의 야구 관람을 제안했을 때는 야구 관람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호감을 갖고 있던 이성 친구였으니 새로운 인연의 출발선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에 나도 들떴다. 그런데 82558255, 828282…. 계속 울려대는 삐삐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보니 약속 시각은 이미 지났고 연락을 취하기도 빠듯했다. 또래들보다 한참 앞서 입대 길에 오른 친구 송별회로 새벽까지 술판을 벌인 것을 후회할 겨를도 없었다. 부리나케 야구장으로 향했지만 그날따라 지하철은 굼뜨기만 했다. 9회 말 투아웃 풀카운트에서의 역전 홈런 같은 반전은 없었다. 약속장소에는 야구장 관중의 함성만 우~웅~ 밀려왔다 사라졌다. 휑하니 적막했다. 그렇게 울어댔던 삐삐도 침묵했다. 시작될 뻔했던 인연은 그날 이후 머쓱해졌다. 무산된 게임 같았다. 투수는 마운드에 올라 투구자세를 취했지만 타자는 타석에 오르지 않았다. 혹은 그 반대였거나. 게임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홈런이든 아웃이든 결과 또한 있을 리 만무했다.
 
꽤 오랜 동안 야구는 그날의 엇갈림을 상기시켰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맺어지지 않은 인연에 대한 미련이랄까.

막 닫히려는 지하철 문을 통과하고 못하고에 따라 삶의 궤적이 완전히 달라진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Sliding Doors>의 주인공처럼, 그날의 작은 차이가 내 삶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만 같았다. 만약 제 때 나타나 함께 야구경기를 봤다면 지금 어땠을까? 그 친구가 좀더 나를 기다렸다면, 또는 그렇게까지 나를 책망하지 않았더라면…. 투수 손을 떠난 공에는 미련이 없지만 아예 던져지지 못한 공은 못내 아쉽다.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선망과도 비슷했다. 그래서 야구시즌이면 버릇처럼 그날이 불쑥 아른거렸다. 

그 부질없는 버릇은 경부고속도로 어느 휴게소에서 털어냈다. 휴게소 치고는 드물게 야구 타격 게임장이 딸렸다. 당시의 야구장이 떠올랐는지 홀로 타석에 들어설 때는 결연하기까지 했다. 호기로운 타격자세로 날아오는 모든 공에 맞섰지만 번번이 헛스윙. 까르르 깔깔깔~ 왜 그렇게 야구를 못해! 언제부터였는지 딸과 아내가 지켜보고 있었다.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순간 멈칫 놀랐다. 현재의 또렷한 실재가 과거의 흐릿한 잔상을 압도했다. 숱한 갈래 길을 돌고, 수 없는 선택과 포기를 거듭한 끝에 맺어진 인연이 눈앞에서 선명했다. 어쩌면 그날의 엇나간 야구약속도 결국 이 인연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홈런을 위한 볼 고르기였거나! 
 
글 김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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