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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SHOPPING-동대무너의 쇼핑분투기

  • Editor. 천소현
  • 입력 2014.07.29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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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부터 ‘동대무너가’ 됐다. 흥인지문에서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에 한옥을 얻고 이삿짐을 내려놓으면서부터다. 이 좌표의 재정립으로 서울생활 35년 만에 비로소 ‘in 4대문’에 성공했다는 자랑은 혼자만의 뿌듯한 넋두리다. 부자들은 앞 다투어 강남에 살기를 원하고, 노년에는 전원생활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요즘 세상에 누가 4대문 안팎을 따지겠는가. 

그러나 막상 ‘동대무너’가 되어 
시청에서 동대문까지, 한양의 옛 시전거리를 
매일 40분씩 걸어서 퇴근하다 보니 
이건 굉장한 횡재다. 매일매일이 모험이다. 

대한민국 쇼핑 디스트릭트, 종로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퇴근 동선에서 걸리는 시장만 대충 나열해도 청계공구상가, 종로귀금속상가, 의료기기상가, 조명상가, 종로꽃시장, 낙원상가, 광장시장, 약국상가 등등 만나는 상점마다 전문점, 도매점이 아닌가. 나는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쇼핑을 한다고 헤맸던 걸까, 이런 후회가 밀려왔다. 

툇마루 창을 가릴 커튼은 광장시장에서 샀다. ‘빈대떡과 소주’로만 기억했던 광장시장의 이면에 그렇게 많은 주단, 포목, 직물, 커튼, 침구, 수예점들이 있었다니. 이곳에도 떨이용 가판대가 있어서 짝이 맞지 않거나 재봉이 미완이거나 오래된 재고가 반값이었다. 갖고 싶었던 광목 커튼 한 폭을 2만원도 안 주고 득템. 이 동네의 룰을 모르고 현금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했더니 그만큼 깎아 주시는 호의까지 넙죽 받았다. 

마당 물청소에 필요한 호스는 동대문 문구·완구종합도매시장의 잡화도매점에서 찾았다. 종류가 여러 가지여서 고심 끝에 하나를 고른 후 아주머니께 물었다. “제가 확신이 안 서서 그러는데, 이것 가져가서 맞춰 보고 혹시 안 맞으면 저걸로 바꿔 가도 되나요?” 답은 흔쾌히 “그러셔”였다. 결국 2주 후에 호스 소켓을 교환하며 그 흡족한 기분이란. 박스 단위로 거래가 이뤄지는 도매상점에서 개미쇼핑족이 예의바르게 처신하면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나의 쇼핑은 점점 ‘현금할인’과 ‘가판대 보물찾기’의 세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갈고 닦은 기량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신세계가 바로 옆 동네, 동묘에 있었다. ‘6090의 홍대’라는 동묘풍물시장에서 처마 끝에 매달 풍경을 반값에 구입. 이날의 마지막 손님이 되어 7시 이후에 흥정한 것이 역시 주효했다. 물론 성공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피부과 시술 후 처방전을 받아들고 똑 같은 두통약이 700원이나 저렴했던 ‘우리 동네의 그 무수한 도매약국’을 떠올렸지만 ‘그런 약은 없다’는 소리를 10번도 넘게 듣고 나서 병원에 연락해 약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도매약국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다르다는 교훈. 

몇 달이 지났지만 동대문은 여전히 신기하다. 주중 내내 5,000원이던 물건이 주말이 되면 ‘오늘만 5,000원’이 된다거나 수년째 영업해 온 가게가 갑자기 ‘점포정리’ 푯말을 내거는 일쯤이야 애교. 큰 상가들이 문을 닫는 주말이면 상가 사이 골목에 노점들이 들어서는데 두타보다, 인터넷 쇼핑몰보다, 그 어느 곳보다 저렴하다. 

하지만 요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런 가격표가 아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스치는 지게꾼 아저씨들의 빈 지게, 장사가 안 된다며 울상인 신발도매상가의 이모님들의 얼굴이 먼저 보인다. 은행이 문을 닫은 후에만 노점을 펼칠 수 있는 야채상 할머니의 고단한 얼굴에서 오늘의 매상이 읽힌다. 

무더위에 싱싱함을 잃어버린 오이 한 바구니를 
구입하며 생각한다. 이제 흥정은 글렀다고. 
 
글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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