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아의 여행과 인문] 친구 사이
[박재아의 여행과 인문] 친구 사이
  • 트래비
  • 승인 2016.12.0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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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츠의 전기기술자인 오십대 나훔은 아내와 아들을 잃고 17살 딸 하나만을 애지중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훔과 친구 사이인 역사 교사 다비드 다간은 결단과 소신으로 가득 찬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다. 다간은 본인만이 키부츠의 모든 중대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듯, 늘 다른 사람의 말을 자르고 “자, 잠깐 내 말을 들어봐”하며 상황을 정리해버리곤 한다. 나훔은 어느 날 오십대인 친구 다간이 17살짜리 자신의 딸과 동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은 일 끝나면 정말로 거기에 가야지. 두 사람 모두에게 말을 할 거야. 긴말하지 않고 에드나의 팔을 붙잡고 끌고 나와 집으로 데려와야겠어…그렇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어떻게 말해야 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내 감정은 억제하고 두 사람의 이성과 책임감에 호소해야 할까?” (51~52쪽) 
 
이 대목에서 나훔은 다간에게도 딸에게도 뭐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발로 땅을 긁적일 뿐이다. 나훔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분노도 비난도 아닌, 고통과 실망만 가득하다. 왜 나훔은 딸의 머리채를 잡고 당장 그 집에서 끌고 나오지 못했을까, 다간에게 표리부동하고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한 사발 퍼붓지 못했을까? 물론 내 자신도 평생 큰 소리 내며 싸워본 적이 없는지라 한편으론 이해하지만 그러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다. 하나 뿐인 딸이 아빠의 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다. 나훔의 소심하고 쪼잔한 행동을 보며 답답하고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 사건의 전후, 즉 맥락(context) 속에 직접 나를 놓아두고 보면 나훔에게 화가 나기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더 크다. 여덟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친구 사이’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직후인 1950년대의 키부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키부츠에서는 주민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을 실천하고 모든 주민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모든 재산은 공동체가 공동 소유한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나 노인을 보살피는 일도 가족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책임이다. 공동체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완벽한 자립이 키부츠의 목표다. 얼마나 이상적인 공간인가. 
 
우리도 어서 부패한 정권을 벗어버리고 이런 알콩달콩한 세상에 살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촛불을 드는 중이리라. 하지만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낙원처럼 보이는 키부츠 안에서도 사회의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답을 줄 수 없는 사랑, 우정, 부성애 등 인간 본연의 감정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다. 평등과 공익이 제 1순위의 가치인 이 공간에서 개인의 욕망은 버려야 할 악이며, 외로움은 허용되지 않는 감정이다. 
 
“그 사람이 다른 곳에서 살았다면 좀 덜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부츠 사회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어떤 해결책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키부츠 공동체라는 발상 자체가 외로움이라는 개념을 부정했다.”(123쪽)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친구여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외로움은 친구도, 그 누구도 달래주지 못했다.” 
 
친구여야 하기 때문에 친구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에 분노와 외로움을 표출해야 하는 것일까. 분노할 수 있어서, 외롭다 말할 수 있어서, 그립다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시공간과는 전혀 무관한 1950년 대 키부츠에서 일어난 한 ‘허용된 불륜’ 사건을 통해 부성애가, 개인의 분노가, 공동 소유나 평등과 같은 원칙보다 더 숭고하고 원초적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것처럼 ‘맥락의 전환’만으로도 우리는 종종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가 너무 커 보일 때, 근거 없는 불행과 자기폄하가 반복될 때, 나를 벼랑 끝에 몰아세우기 보다는 여행이나 소설 읽기처럼 나를 다른 맥락에 놓아보는 일이 치료법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흐름과 맥락을 바꿀 만큼 거국적인 외침이 파도타기 하는 시기에도 외롭다, 힘들다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관용이고 민주주의라는 생각도 소심하게 해본다. 우린 친구여야 하는 “친구 사이”는 되지 말자. 
 
박재아
사모아관광청 한국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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