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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아의 여행과 인문] 타임루프(Time Loop)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7.01.0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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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67%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 ‘데자뷰’(기시감(旣視感), 처음 본 대상을 이미 본 것 같은 느낌)를 겪는다고 한다. 10대 후반과 20대 때 가장 많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줄어든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든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데자뷰라는 개념을 더 많이 알고 있고, 기억력이 더 생생하기 때문에 더 자주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긴장, 흥분, 쾌감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Dopamine)을 적게 만들어 내고, 이에 반응하는 능력도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일부 과학자들은 설명한다. 따라서 신경과학적 원리로만 보면 사람들은 데자뷰를 통해 불쾌감보다는 즐거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떠올려 보시라. 꿈 혹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을 실제로 다시 마주하게 될 때 짜릿한 소름이 돋지 않았는가. 

하지만 데자뷰를 매일, 매 순간 겪는다면? 연인과 이별한 고통을, 손가락을 베었을 때의 뜨끔함을 매일 다시 느껴야 한다면, 어제 봤던 영화를 같은 자리에서 매일 다시 봐야 한다면 감동과 호기심보다는 지루하고 언짢은 기분이 들 것이다. 데자뷰의 빈도가 높아진 상태는 타임루프에 갖힌 상태다. 고리나 원, 또는 그처럼 끝과 끝이 연결되어 무한반복된다는 뜻의 ‘루프(Loop)'에서 나온 말로, 특정 시간대에 갇혀서 똑같거나 비슷한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하루를 다시 아홉번 반복해서 살아보고 싶은 날은 어떤 날인가요?' 라는 질문은 설레지만, 그 어떤 희열과 좋은 경험이든 그것이 평생 반복된다면 차라리 형벌에 가깝다. 

1985년, 타임머신을 선보인 <백 투 더 퓨처>를 시작으로 <루퍼>, <시간여행자의 아내>, <어바웃 타임>, <플러스 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등 타임루프와 타임리프, 타임워프, 타임슬립 등 시간의 왜곡을 중심으로 상황설정을 한 소설과 영화가 꽤 많다. 2014년 개봉한 영화인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도 주인공 빌 케이지(톰 크루즈)는 자살 작전이나 다름없는 전쟁터에 훈련이나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배정된 뒤 죽임을 당하는 하루를 반복하는 타임루프에 갖힌 상태다. 불구덩이에 빠져 살갗이 모두 타 없어지면 꺼내어 진 다음 ‘다시' 던져지는 고통의 반복은 너무도 두렵고 지옥 같은 경험이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이 가장 무서운 지옥인 이유는 고통이 크건 작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요령이 생긴다는 점이다. 

2017년의 첫 날이 오는 것이 기대되고 설레었는지 묻고 싶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부터 의미도 감동도 재미도 없는 타임루프에 갖혀 살게 되었는지는 기억하는가? 12월 31일 12시에 잠들어 있으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말에 보신각 종소리를 다 듣고서도 한참 동안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잠들지 못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서른 중반을 지나며 한해의 마지막 날의 아쉬움과 새해 첫 날에 대한 설렘의 간극은 점점 좁아졌다. ‘어차피 올해와 비슷할 새해…’가 ‘반복’될 테니 말이다. 

다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로 돌아가 보자. 처음 시간이 돌아간 것은 톰크루즈가 죽어서가 아니라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외계생명체의 사령탑 격인 알파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추신경을 회복하기 위해 알파가 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톰크루즈에게는 시간을 다시 사는 능력이 생긴다. 일단 시간을 되돌린 후에 알파를 죽게 한 원인이 된 사람을 찾아내 없애고자 하는 외계인들의 계산이다. 치명적 결함을 입은 외계생명체 측에서는 세력을 재집결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것이지만, 동시에 인류도 이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이미 모든 상황을 겪은 후, 서로에게 패가 다시 쥐어진 것이다.

큰 맥락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올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습관을 갖고 살게 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적응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존재다. 동시에,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어제같은 지루한 뫼비우스띠를 잘라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진 존재다. 이미 진 바둑이지만 다시 수를 물려준다면 자, 어떻게 하시겠는가. 이미 수도 없이 한 게임이지만, 우리 손에는 또 매일 패가 주어진다. 2017년이라는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제 막 주사위를 던지려던 찰나다. 
 
*박재아는 주한FIJI관광청 대표를 비롯해 사모아관광청 대표, 남태평양 관광기구 자문 및 모리셔스, 태즈매니아, 타히티 등 섬 지역 홍보·마케팅을 10년 이상 담당했다. 여행을 사회학적, 통섭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글을 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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