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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토에서 쿠바 한 잔

  • Editor. 문미화
  • 입력 2019.02.08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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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한 오픈카를 타고 달리는 중절모를 쓴 쿠바노
클래식한 오픈카를 타고 달리는 중절모를 쓴 쿠바노

시간이 켜켜이 쌓인 건물들, 그 사이를 달리는 올드카.
헤밍웨이가 사랑한 모히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
늘 마음속, 품어 온 쿠바를 향한 낭만적 단어들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당장 쿠바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이유.

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센트로 아바나
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센트로 아바나

●낯섦의 시작


하필이면 칠흑 같은 밤이었다. 인천에서 멕시코시티를 거쳐 쿠바 호세 마르티 공항(Jose Marti International Airport)까지는 대기 시간을 포함해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렸다. 처음 두 볼에 맞닿은 쿠바의 후덥지근한 밤공기는 생각보다 기분 좋게 다가왔다.

공항에서 아바나(Havana) 시내까지 가는 택시를 타기 위해서는 환전이 우선이다. 쿠바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2가지의 화폐를 사용한다. 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화폐인 CUC와 내국인용 화폐인 CUP(또는 MN)이 있다. 복잡한 건 딱 질색, 일단 여행자 화폐로 환전을 마친 후 택시를 잡아 세웠다. 굴러가면 다행일 만한 작고 낡은 택시였다. 가로등 불 하나 없이 스산한 밤길, 늙어 버린 엔진 소리가 퍼졌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틴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달리던 택시는 오래 지나지 않아 아바나 중심부에 다다랐다. 예약해 놓은 숙소 앞에는 호스트가 나와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보다는 어지러움이 먼저 밀려들었다. 승차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낡은 택시에 호된 신고식을 치른 엉덩이도 엉덩이지만, 호기롭게 떠난 낯선 이국의 땅에서 낯가림을 심하게 했거니….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아바나의 담벼락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아바나의 담벼락

호스트는 자신을 아바나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소개했다. 쿠바는 ‘의료와 교육의 무료화’라는 이상을 실현한 유일한 국가다. 원한다면 누구나 무상으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세계적인 수준의 의료기술도 가지고 있다. 

쿠바 곳곳에서 체 게바라의 벽화를 만나 볼 수 있다
쿠바 곳곳에서 체 게바라의 벽화를 만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쿠바는 사회주의인 탓에 병원을 비롯한 호텔, 교통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이 정부에 의해 운영된다. 즉 의사 역시 공무원으로 다른 직업군과 비슷한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는 것. 쿠바인들의 평균 연봉은 25CUC 정도로 공항에서 아바나 시내까지 30분 안팎인 택시비가 20CUC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다. 그는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부업으로 까사 파르티쿨라(Casa Particular)를 운영한다고 했다.

쿠바 정부는 개인의 경제 활동 보장과 관광업 진흥을 위해 일정 요건을 갖춘 민간인에게 택시나 민박 형태인 까사 운영을 허가한다. 개인이 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조건은 굉장히 까다롭지만 한 집 넘어 한 집이 전부 까사다. 여행 내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까사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지금도 절대 까먹지 않는, 유일한 스페인어가 “빈방 있어요?”라니 말 다 했다. 여행이 거듭될수록 내게 꼭 맞는 까사를 찾아내는 노하우가 생겼다. 쿠바의 다양한 지역을 다니며 묵었던 까사에서의 생활은 쿠바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올드 아바나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올드 아바나

●잃어버린 시간을 향유하다

쿠바 여행의 시작과 끝은 아바나로 통한다. 아바나는 카피톨리오(El Capitolio)를 중심으로 신시가지인 베다도(Vedado) 지역과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는 구시가지 센트로 아바나(Centro Habana) 지역 그리고 아바나 비에하(Habana Vieja) 지역으로 나뉜다. 19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바나에는 빛바랜 시간의 흔적들이 그림처럼 남아 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골목.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화려한 올드카가 카피톨리오 앞을 지나간다. 이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

주요 관광지 및 시내 곳곳을 누빌 수 있는 올드카 투어
주요 관광지 및 시내 곳곳을 누빌 수 있는 올드카 투어

쿠바가 올드카의 천국이 된 데에는 뼈아픈 과거가 있다. 쿠바는 한때 미국의 부호들과 마피아들의 휴양지였다. 상당수의 미국인이 쿠바로 넘어오면서 호텔과 카지노를 지었고 해안도로를 따라 레이싱을 즐겼다. 하지만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쿠바 혁명이 승리를 거두며 미국인들은 도망치듯 쿠바를 떠난다. 이에 미국은 경제 봉쇄로 쿠바의 숨통을 조였고, 쿠바 정부는 자동차 등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그 여파로 인해 새 차를 살 수 없게 된 쿠바인들은 당시 미국인들이 버리고 간 차를 고쳐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지금, 올드카는 쿠바를 상징하는 명물이 되었다. 아바나 대극장 앞에는 형형색색의 올드카가 줄지어 서 있다. 호시탐탐 여행객들의 마음을 홀리기 위해서다. 올드카 투어 가격은 1시간에 30CUC 정도.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과 말레콘(El Malecon) 등 아바나 시내에 위치한 주요 명소를 아우르는 코스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핑크색 오픈카를 골랐다. 쿠바의 맑고 청아한 하늘과 아주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운영하는 40년이 넘은 올드카였다. 뒷자리는 두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널찍했으며 관리를 어찌나 잘했는지 거침없이 도로를 질주했다. 실로 쿠바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고전 영화에나 나올 법한 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누비는 느낌은 무엇을 상상하던 상상 그 이상이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쿠바 아티스트의 그림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쿠바 아티스트의 그림들
영화 같은 분위기의 골목에서 키스를 나누는 연인
영화 같은 분위기의 골목에서 키스를 나누는 연인

●구시가지와 사랑에 빠지다

정수리가 너무 뜨거웠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지쳤고, 일정하지 않게 박힌 바닥의 돌들은 다리를 더욱 피곤하게 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다양한 식민 시대 건축물이 가득한 구시가지는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였기 때문.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족히 열 번은 돌고 돌았던 골목이었지만 항상 다른 길처럼 새롭게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이런 풍경을 보고 자란 덕일까? 쿠바 골목 곳곳에서 숨은 보석 같은 아티스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는 쿠바의 자연과 닮았고, 터치는 아주 섬세했다. 산호세 수공예 마켓(Mercado de Artesania Sanjose)에서 모로성이 그려진 소담한 그림 하나를 샀다. 두고두고 그리울 아바나를 추억하기 위해.

아바나 대성당 광장으로 가는 길목
아바나 대성당 광장으로 가는 길목

●쿠바를 쿠바답게 만들어 주는 것들

비에하 지역에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산 프란시스코 광장(Plaza de San Francisco), 아바나 대성당 광장(Plaza de la Catedral) 등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크고 작은 광장들이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400년 역사의 비에하 광장(Plaza Vieja)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광장으로 식당과 노천카페를 비롯해 미술관, 박물관 등으로 둘러 쌓여 있다. 35m 높이의 카마라 오스쿠라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비에하 광장은 속절없이 아름다웠다.

더위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은 밥보다 카페인을 원했다. 광장 모퉁이에 위치한 카페 에스코리알(Cafe El Escorial)의 내부는 원두를 볶는 냄새로 진동했다. 간절하게 바란 시원한 메뉴는 없었지만, 단언컨대 살면서 먹었던 커피 중 가장 맛있었다.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끝 맛이 인상적인 커피는 쿠바를 더욱 쿠바답게 각인시켜 주었다. 

여행자의 흥을 돋우는 밴드 ‘로스 맘비쎄스’의 거리 공연
여행자의 흥을 돋우는 밴드 ‘로스 맘비쎄스’의 거리 공연

관광객이 가장 많은 오비스포 거리(Calle Obispo)로 들어섰을 때였다. 어느 라이브 바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Chan Chan)’이다. 그렇다, 나를 쿠바로 이끈 것은 8할이 그들의 음악이었다. 어린 시절,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곤 쿠바 음악의 매혹적인 선율에 푹 빠졌다.

모든 멤버가 나이 든 노인이었지만 죽는 그날까지 자유로운 열정을 뿜어냈던 그들을 보며 쿠바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일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쿠바에선 굳이 라이브 공연장에 가지 않아도 온 거리가 음악 천지다. 음악이 듣고 싶다면 가던 길을 멈춰 서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흥 넘치는 살사댄스를 추고 있었다. 어디든 무대였고, 길 위에서 사랑이 시작되었다.

없던 썸도 생겨날 아름다운 말레콘의 노을
없던 썸도 생겨날 아름다운 말레콘의 노을
말레콘에 기대 앉아 카리브해를 바라보는 여인
말레콘에 기대 앉아 카리브해를 바라보는 여인

●세상의 모든 낭만

올드카가 카리브해를 벗 삼아 달린다. 쿠바 여행을 꿈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랄 만한 장면이다. 8km 정도 길게 뻗은 해안 도로인 말레콘(Malecon)은 스페인어로 방파제를 뜻한다. 기분 좋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레콘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오래 거센 파도를 맞았는지 크게 부식된 곳도 많았다.

아바나 사람들에게 말레콘은 쉼터 그 이상의 장소다. 말레콘에 걸터앉아 하릴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낚시를 하기도 한다. 질투 날 만큼 아름다운 쿠바의 석양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 붉은빛으로 곱게 물드는 순간. 이 세상의 낭만은 모두 이곳에 내려앉은 듯했다. 
 

글·사진  문미화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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