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에 빚진 시간들, 아마미군도
산호에 빚진 시간들, 아마미군도
  • 천소현
  • 승인 2019.03.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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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론섬 최고의 명소인 유리가하마.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산호섬이다
요론섬 최고의 명소인 유리가하마.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산호섬이다

아미미군도는 투명한 바다에 둥실 떠오른 빙산의,
아니 산호의 일부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다.
그 위에서 일주일 동안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었다.
뼛속까지 든든한 힐링이었다.

아마미군도 奄美群島
일본 본토의 최남단 가고시마현에서 남서방향으로 오키나와까지 펼쳐져 있는 군도로 요론섬((与論島, 요론토), 오키노에라부섬(沖永良部島, 오키노에라부시마), 도쿠노섬(徳之島, 도쿠노시마), 아미미오섬(奄美大島, 아마미오시마) 등 8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가고시마현 소속이지만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았었고, 지리적, 문화적으로도 오키나와에 가깝다.

 

아마미군도, 그 투명함의 이유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아마미군도는 마치 계곡물처럼 투명한 바다색으로 유명하다. 백사장에서 몇 발자국만 나가도 산호 생태계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경산호의 북방한계선에 자리 잡고 있다. 딱딱한 석회질의 경산호는 퇴화되면 암초처럼 단단한 산호초가 된다. 아마미군도의 섬들은 대부분 이 산호초가 융기되어 굳어진 섬이다. 즉 산호라는 자포동물의 뼈 무덤이 떠올라 섬이 된 것이다. 같은 융기 산호섬이라도 해도 요론섬과 오키노에라부섬은 비교적 평평하여 하천이 없고, 지하 동굴이 발달했다. 반면 도쿠노섬은 산악지형이 발달해 하천이 흐른다. 오랜 세월 융기와 침식을 반복하면서 육지와 만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던 아마미군도에는 희귀한 고유 동물과 식물들이 살고있다. 수려한 풍경뿐 아니라 희귀한 생태계 덕분에 2017년 3월에 일본의 34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요론섬에 도착한 여객선
요론섬에 도착한 여객선

●与論島 요론섬
요론섬을 여행하는 속도


요론과 미코노스의 공통점


아침 7시. 파고가 애매했다. 일단 나가사키에서 출항은 가능한데 파도가 높아 요론섬 입도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입도에 실패하면 다음 섬으로, 거기도 안 되면 그 다음 섬으로, 최악의 경우 저녁에 다시 출발한 항구로 돌아와야 한다며 매표원은 ‘타겠는가?’를 물었다. 이것이 섬 여행의 리스크이자 묘미가 아닌가. 이미 한국을 떠나온 여행자들의 선택은 ‘무조건 고!’였다. 날이 좀 흐렸지만 다행히 파도는 길을 열어 주었고, 예정대로 요론섬에 도착했다. 면적 20.8km, 섬 둘레가 약 23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 도보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배낭을 메고 요론섬 관광안내소까지 1.5km를 걷는 동안 투지가 넘쳤던 도보여행자들은 곧 히치하이커들이 되었다. 간절한 표정을 읽은 어느 호텔의 승합차가 멈춰 서는 것으로 이날의 구조가 이뤄졌다. 

그리스풍의 카페가 많은 이유는 미코노스섬과의자매결연 때문일까
그리스풍의 카페가 많은 이유는 미코노스섬과의 자매결연 때문일까

민망할 정도로 금세 도착한 요론섬 관광안내소는 구멍가게처럼 아담했지만 만능이었다. 캠핑장 예약, 버스표 구입, 기념품과 지도 수령, 짐 맡기기가 원스톱으로 해결됐다. 하루에 10회만 운행하는 섬 버스(버스 일주는 40분이 걸린다) 시간도 잘 체크했다. 마당을 장식한 산호와 조개껍데기 장식에 이끌려 들어간 레스토랑 시사이드 애비뉴(Seaside Avenue)를 포함해 어항 인근에는 묘하게 그리스풍이 느껴지는 카페, 레스토랑들이 많았다. 알고 보니 요론섬의 자매도시가 미코노스다. 이 자매들의 공통점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바다인가 보다.  

손님을 기다리는 노점할머니
손님을 기다리는 노점 할머니

요론섬은 아미미군도 중에서 가장 작지만, 섬 주변의 산호초 면적은 가장 넓다. 하늘에서 보면 겹겹의 산호들이 섬을 에워싸고 있다. 이틀 정도면 걸어서 정복할 수 있는 작은 섬에 산호모래가 까끌거리는 해변, 투명에 가까운 바다, 고즈넉한 산책로의 열대 꽃들, 아늑한 카페와 레스토랑까지 갖추고 있는 보석 같은 여행지다. 여행자로 붐비는 여름에는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11월의 요론섬은 여백, 그 자체였다. 여행자도 적었다. 그래서 쌩쌩 달릴 줄 알았던 섬 버스가 시속 10km로 걷기 시작했다. 목을 빼어 보니 전방에 한 학생이 도로를 점거한 채 달리고 있었고, 어디선가 ‘간바레!’ 하는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섬 일주 릴레이 달리기가 진행 중이었다. 길이 갈라질 때까지 버스는 여러 주자들의 꽁무니를 참을성 있게 쫓았다. 요론섬의 속도였다. 

요론섬에 도착한 여객선
오가네쿠해변에 드리운 무지개

바다에 핀 백합 한 송이를  


요론섬의 유일한 캠핑장인 유리가하마 캠핑장은 오가네쿠해변(大金久海岸)을 끼고 있었다. 2km에 이르는 산호모래 해변이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나선 해변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그토록 완전하게 반원이고, 또렷하게 일곱 빛깔인 무지개는 처음이었다. 해변의 산호모래들도 또렷하게 자신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었다. 발끝으로 조심스레 그 형태를 쓰다듬는 사이 무지개가 떠나고 다시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산호 밭을 갈아엎어 놓은 듯 아직 굵직굵직한 산호 덩어리들이 자신의 원형을 기억하고 있었다. 날씨가 궂어서 캠핑도 주춤해졌다. 2층 침대가 있는 방갈로, 육각형의 트리하우스, 도톰하게 다져 놓은 텐트사이트 등 각자 편한 잠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유리가하마 캠핑장의 석양
유리가하마 캠핑장의 석양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해변으로 나왔다. 전날 빈 바다에 둥둥 떠 있던 배들은 알고 보니 모두 바닥이 투명한 글라스 보트였다. 그 투명도를 몸소 목격하며 1.5km 정도 달려 나가자 한 송이 백합처럼 하얀 풀등이 떠올라 있었다. 유리가하마는 ‘백합해변(百合が浜)’을 뜻한다. 아무리 기온이 온화해도 수영까지는 무리다 싶은데, 보트 동승자들이 비키니로 무장한 이유는 역시 ‘인생 숏’ 때문이었다. 다시 물이 차오르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땅이니 갔노라 보았노라, 증명이 더욱 절실한 것일지도. 자신의 나이만큼 ‘호시노수나(별 모양의 산호모래)’를 수집하면 행복을 얻게 된다는데, 모래를 동내고 싶지는 않았다. 파라다이스를 다녀오는 왕복 뱃삯은 3,000엔, 겨울철에는 밤에 조수가 낮아져서 사실상 방문이 어렵기에 봄과 여름에 가는 것이 좋다. 

검은 꽃을 뜻하는 쿠로하나해변
검은 꽃을 뜻하는 쿠로하나해변

사색 너머로의 산책 


섬을 걸어 보기로 했다. 숙영지였던 오가네쿠해변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보자는 계획이었다. 기후가 다른 만큼 풍경도 달랐다. 붉은 하이비스커스 꽃과 야자수 사이로 뻗은 도로를 걷다가 잘 익은 라즈베리를 따 먹기도 하고, 쑥쑥 자란 사탕수수 한 줄기를 베어 야생의 단맛을 느껴 보기도 했다. 중간 거점은 섬의 둘레에 총총 박혀 있는 작은 해변들이었다. 하얀 산호모래와 대조적으로 새까만 산호암석들은 아랫부분이 침식으로 잘록해져 쿠로하나(黑花), 즉 ‘검은 꽃’으로 불린다. 그 흑화가 유난히 발달한 해변이 바도 쿠로하나해변이다. 바위 상부는 평평하지만 무수한 구멍의 연속이라 모서리들이 날카롭다. 그 웅덩이 중에는 ‘비둘기의 호수’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호수가 있다. 가뭄에도 이 물만큼은 마르지 않아서 새들이 와서 목을 축인다고. 

요론섬은 이틀 정도면 도보로 완주할 수 있는 작은 섬이다
요론섬은 이틀 정도면 도보로 완주할 수 있는 작은 섬이다

나란히 붙어 있는 테라사키해변(寺崎海岸)과 투마이해변(トゥマイビーチ)은 영화 <안경>의 촬영지라서 여행자들이 꼭 찾는 명소가 됐다. 요론섬 여행자에게 <안경>은 그 어떤 가이드북보다 유용하고, 심지어 영감을 준다. <카모메 식당>의 감독이기도 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요론섬을 ‘사색의 섬’으로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옹호했다. 요론섬 관광 지도에도 안경 촬영지가 표시되어 있고(안경 마크를 확인하라), 유튜브에서도 <안경> 촬영지를 테마로 요론섬을 여행한 동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영화에 등장했던 해변에서의 아침 체조는 ‘해변 요가’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있다.  

투명함이 찰랑이는 투마이해변
투명함이 찰랑이는 투마이해변

요론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방법은 ‘비박(혹은 비부악)’이었다. 텐트 없이 침낭만 덮고 노지에서 자는 행위를 말한다. 장점은 열린 하늘이고, 단점도 열린 하늘이다. 너무 덥지 않고, 너무 춥지 않은 계절에만 가능한데, 아마미의 11월이 딱 그랬다. 생애 첫 비박은 몸과 마음의 준비가 모두 필요했다. 해변에 있던 서핑보드 3개를 끌어와 침상을 만들고, 빈 배를 세워 바람막이를 삼았더니 놀랍도록 안락해졌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잠깐씩 눈을 뜨면 하늘 가득 펼쳐진 은하수가 포근히 내려앉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별나라와 꿈나라를 바삐 오갔던 첫 번째 비박의 끝은 붉게 상기된 하늘이었다. 밤새 지구 반바퀴를 돌아온 고단한 해를 누워서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림 같은 일출은 없었지만 잊을 수 없는 아침이었다. 침낭에 추억 한 자락을 함께 말아 넣었다.  
요론섬관광정보 www.yorontou.info

해변에서 은하수 이불을 덮고잤던 첫 번째 비박
해변에서 은하수 이불을 덮고 잤던 첫 번째 비박

 

●沖永良部島 오키노에라부섬
바다에 새겨진 시간의 지문

삶의 자리로 들어온 황도 12궁


아침 일찍 나가사키를 출발해 요론섬까지 5시간여를 달려왔을 배를 타고 다음 여행지인 오키노에라부섬으로 향했다. 첫 번째 야영지는 오키도마리해변공원(沖泊海浜公園)이었다. 오랜만에 화창한 해가 나오자 밤이슬에 젖은 야영 장비를 널고, 그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따뜻한 햇살, 보드라운 모래, 파도의 씻김 소리, 바삐 이동하는 구름…. 밤에는 다시 해변에서 비박을 청했다. 하나 둘 보이는 별자리가 늘어나고, 별이 이동하는 경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교과서의 황도 12궁이 처음으로 삶의 자리로 들어왔다.  

거대한 용나무가 드리워진 오키도마리해변공원캠핑장
거대한 용나무가 드리워진 오키도마리해변공원캠핑장

섬 탐방에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어차피 오키노에라부섬은 요론섬보다 4배 가까이 크다. 코시야마정상부의 공원(越山公園) 전망대에 오르니, 배가 와 닿은 항구의 위치부터 2개의 마을(와도마리정, 지나정), 넓은 사탕수수밭까지 환했다. 

영화 속에서 고질라가 상륙했던 해변에서의 비박
영화 속에서 고질라가 상륙했던 해변에서의 비박

바다에서 떠오른 오키노에라부섬에는 멧돼지나 뱀 등의 야생 동물이 살지 않는다. 이런 섬이 영화 <고질라 VS 스페이스고질라>의 배경지였다니 아이러니하다. 
정작 오키노에라부섬이 자랑하는 두 가지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나는 ‘유리’다! 요론섬에 백합해변이 있다면, 오키노에라부섬은 진짜 백합으로 유명하다. 일본 최대의 백합생산지라서 90% 이상이 이곳에서 재배된다고. 두 번째는 동굴이다. 오키노에라부섬에는 200~300여 개의 동굴이 있다. 대표적인 동굴인 쇼유도(昇竜洞) 석회석 동굴은 1963년 발굴된 3.5km 중 600m 구간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평평한 지형의오키노에라부섬에는 200여 개이상의 동굴이 있다
평평한 지형의 오키노에라부섬에는 200여 개이상의 동굴이 있다

후챠(フーチャ)도 원래 그런 산호 동굴 중 하나였지만 파도에 의해 천장 부분이 무너지면서 하늘이 열렸다. 큰 파도가 치면 마치 거대한 고래가 상륙한 것처럼 그 구멍으로 바닷물이 20~70여 미터나 솟구쳐 올라서, ‘물총 동굴’이라고도 불린다. 이 때문에 인근 농지에 염해가 발생하자 1963년 4개의 후챠 중 3개를 없앴고, 하나만 관광지로 남겼다. 아마미군도는 태풍의 길목에 놓여 있어서 피해가 잦은 곳인데, 사나운 비바람의 흔적들은 해안 절벽마다 손이 베일 듯 날카롭게 새겨져 있다. 

바다 빛깔이 특히 더 고운 한자키에서 기념촬영
바다 빛깔이 특히 더 고운 한자키에서 기념촬영

한자키(半崎)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곶 지형이다. 폭신한 풀이 깔린 초록 낭떠러지 너머로 푸른 바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스노클링과 낚시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장한다. 절벽 앞 바위는 태평양 전쟁 때 군함으로 오인되어 총격을 받기도 했다고. 

구니가미초등학교의 일본 최대 반얀트리
구니가미 초등학교의 일본 최대 반얀트리

마지막으로 구니가미초등학교에 들렀다. 역사가 무려 121년이나 되는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일본 최대 크기의 용수(榕樹, 반얀트리)가 자라고 있었다. 높이 8m, 가장자리의 둘레가 22m나 되는 거목인데, 그늘 아래 들어가 보니 마치 숲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이 나무를 심었다는 1회 졸업생은 몰랐을 것이다. 그 나무를 보기 위해 훗날 일본 천황까지 학교를 방문하게 될 줄은. 

후챠. 동굴 천장이 무너진 사이로 파도가 솟구쳐 오른다
후챠. 동굴 천장이 무너진 사이로 파도가 솟구쳐 오른다
잔잔한 완조해변은 두 번째 숙영지였다
잔잔한 완조해변은 두 번째 숙영지였다

달의 시간에서 만난 사람들


두 번째 숙박지였던 완조해변(ワンジョビーチ)의 비박에는 예기치 않은 손님이 있었다. 물소리가 꽤 멀어졌다 싶어진 한밤중에 방파제 위에서 인기척과 함께 불빛들이 내려왔다. 3명의 동네 아낙들이었다. 방수복에 배낭, 작살을 챙긴 그녀들은 거침없이 바다로 나가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찾았다. 한 시간 가까이 흔들리던 불빛은 묵직해진 배낭과 함께 질서정연하게 사라졌다. 흔히들 섬을 두고 시간이 멈춘 곳 같다고 하지만, 사실 섬사람들은 두 배로 바쁘다는 말이 생각났다. 태양의 시간과 달의 시간을 모두 살며 땅과 바다를 모두 살피며 살기 때문이라고. 그녀들의 아침식사 메뉴를 궁금해하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섬에서의 시간이 축적될수록 여행은 가속이 붙는 듯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네 번째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오키노에라부섬 관광정보 www.okinoerabujima.info

 

●徳之島 도쿠노섬
다시 달콤해진 사탕 지옥


달콤한 지옥에서 살아간다는 것


다시 출발이다. 배를 탑승한 시간은 오후 2시40분. 마지막 여행지인 도쿠노섬(면적 247.77km)으로 향했다. 섬들은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커지고 높아졌다. 아제프린스해변 캠핑장(畦プリンスビーチキャンプ場)에 도착하니 이미 어둑했다. 서둘러 설영을 마치고 랜턴 불빛에 의지해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이미 하룻밤을 보낸 숙영지의 구석구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변의 계단 오솔길을 넘으니 넓은 잔디 광장에 깨끗한 화장실, 샤워장이 있었다. 가까운 화장실을 두고 지난밤 괜스레 먼 걸음을 했던 것이다. 

아제프린스해변의 새벽
아제프린스해변의 새벽

광장에서는 매년 5월에 흑설탕 축제가 열리고, 옛날 방식으로 흑설탕 만들기를 재현한다. 그때 사용하는 설탕 차(대형 착즙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단단하게 물려 있는 톱니바퀴를 돌리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역시 힘센 흑우들이다. 흑설탕이 특산물인 아마미군도에서 옥색 바다 다음으로 흔한 풍경이 키를 넘기는 사탕수수밭이다. 1609년부터 아마미군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사쓰마(薩摩)번(현 가고시마)은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설치하고 수확물을 철저하게 앗아갔다. 아이들이 당분을 맛보려고 손가락을 빠는 행위조차 금지될 정도로 농민들은 철저한 착취와 차별에 시달렸다. 설탕이 많아도 식량을 자급하지 못해 늘 배가 고팠던 ‘사탕 지옥(砂糖地獄)’ 시절이었다.

2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제프린스해변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제프린스해변

아마미군도 중에서 가장 경지 면적이 넓은 도쿠노섬의 논밭도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으로 전용되었다. 이때 섬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오락이 투우였다고. 그렇게 5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도쿠노섬 투우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다. 섬 전역에 13개의 투우장이 있고, 매년 10월 대회에는 수천 명의 관람객이 모일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웅덩이마다 작은 바다가 


도쿠노섬에서는 아예 아제프린스해변에 눌러 앉았다. 일주일 만에 섬의 속도와 환경에 적응이 된 것일까. 신기할 만큼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1.5km의 산호 해변은 물이 차고 빠짐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썰물로 드러난 웅덩이마다 서로 다른 바다가 하나씩 담겨 있었다. 주먹만 한 성게, 손톱만 한 푸른 물고기, 잔뜩 골이 난 복어, 선홍빛 불가사리, 빠르게 모습을 감추는 게들과 느긋한 해삼들, 그리고 미처 통성명을 하지 못한 많은 것들과 인사를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수렵 본능에 희생된 몇몇 성게와 해삼에게는 애도를. 

황태자 부부가 방문한 이후 아제프린스해변이라고 불린다
황태자 부부가 방문한 이후 아제프린스해변이라고 불린다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잠시 인근 케도쿠 마을의 식료품점을 방문했는데, 점원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인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그에게 바다에서 캔 해삼을 먹어도 되냐고 물으니,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지만 괜찮지 않겠냐고. 내게는 냉장 코너의 닭고기사시미가 생소했지만 먹어 보니 괜찮았다. 해삼도 닭사시미도 다 괜찮았다!

물이 빠져나간 웅덩이마다 작은 바다가 고였다. 그 안에서 복어, 불가사리, 성게, 해삼을 만났다
물이 빠져나간 웅덩이마다 작은 바다가 고였다. 그 안에서 복어, 불가사리, 성게, 해삼을 만났다

해변에 머무는 동안 틈틈이 전망대에 올라 바다를 살폈다. 혹여 지나가는 바다거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바다거북의 산란기는 여름이고, 부화된 새끼 거북들도 이미 9월에 모두 먼바다로 떠났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립된 섬의 생태계는 알수록 더 흥미롭다. 도쿠노시마 가시쥐, 강한 독을 지닌 하부뱀 등 이 섬에만 사는 고유종들이 꽤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아마미 검은 멧토끼다. 전세계에서 오직 아마미오섬과 도쿠노섬에만 서식하는데, 개체 수는 200여 마리로 추정된다. 지난겨울 유난히 멧토끼의 교통사고가 많이 일어나 19마리나 목숨을 잃었다는데, 한편으로는 그만큼 개체 수가 늘어났다는 방증이라니, 기분이 묘하다. 

동네 외양간에서 만난 소. 도쿠노섬 최고의 스포츠는 투우다
동네 외양간에서 만난 소. 도쿠노섬 최고의 스포츠는 투우다

도쿠노섬은 남다른 생명력을 지닌 섬이기도 하다. 일본 내에 출산율이 가장 높은 곳이자, 최장수 노인들을 여럿 배출했다.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고.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노인을 공경하는 곳이란다. 결국 천국과 지옥 모두 사람의 일이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누군가 캠핑장 주변의 오래된 폐기물들을 정리했다. 버리고 간 사람이 누구이든, 마지막 이용한 사람은 우리이므로, 다음 사람을 배려하고 싶다고 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 사람의 일이다!  
도쿠노시마 관광정보 www.tokunoshima-kanko.com

 

▶TRAVEL INFO

Transportation
오키나와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방법과 가고시마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인천-오키나와 항공편을 이용해 오키나와 나하에서 1박 후 다음날 아침 배편을 타고 요론섬으로 이동했다. 오키나와 하항에서 요론섬까지는 4시간 50분이 걸리고, 요론섬에서 오키노에라부섬까지는 2시간, 오키노에라부섬에서 도쿠노섬까지는 1시간 50분이 걸린다. 배편은 매일 1회 운항한다. 가고시마에서 이동할 경우 요론섬까지 항공편으로는 1시간 15분, 배편으로는 20시간이 걸린다.  
www.marixline.com, www.aline-ferry.com

Beverage 
음악이 담긴 흑설탕 소주 

가고시마는 고구마 소주가 유명하고, 아마미군도는 흑설탕 소주가 유명하다. 사탕수수 재배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생산지를 벗어나면 구하기가 어렵고, 대량 반출도 어려운 술이라 현지에서 충분히 즐겨 두는 것이 좋다. 여러 브랜드 중에서 ‘엄지 척’을 받은 ‘렌토(Lento)’는 3개월 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며 숙성시켰다는 ‘음악 숙성’으로 유명하다. 확실히 흑설탕 소주 특유의 비린내가 적고, 부드러웠다. 흑설탕 소주는 아마미군도의 5개의 섬(아마미오섬, 기카이섬, 도쿠노섬, 오키노섬, 요론섬)에서만 생산된다. 

Food
케이항(鶏飯) 

아마미군도에서 흔한 토속 요리로, 잘게 찢은 닭고기와 지단, 버섯, 파, 생강, 김 등의 고명을 밥에 올려 닭육수에 말아 먹는 일품요리다. 800~1,000엔으로 즐기는 든든한 식사다. 에도 시대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깔끔한 맛이 더운 날씨에 잘 어울린다. 아마미군도의 섬 사이를 운항하는 선박에서도 판매하지만, 이왕이면 토속적인 분위기의 식당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도쿠노섬에서는 아제프린스해변 인근에 있는 아제 식당을 추천한다. 

▶CAMP SITE

유리가하마(百合が浜)캠핑장 
요론섬 최고의 명소인 유리가하마의 관문인 오카네쿠해변에 위치한 캠핑장.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방풍림 울타리 안에 6동의 코티지, 2통의 트리하우스, 캠핑 사이트가 들어 있다. 캠핑 사이트는 우천 시 배수가 용이하도록 사이트의 바닥을 높게 만들었다. 요론섬 관광안내센터(상공관광과)에서 예약할 수 있다.
+81 997 97 4092

오키도마리해변공원(沖泊海浜公園)
지난여름에도 어김없이 이 섬을 덮친 태풍 때문인지 넘어진 나무들로 해안은 어수선한 모습이었지만, 캠핑장만큼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이용자가 있든 없든 담당자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해 점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용요금도 무료다. 취사장 옆에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덕까지 마련되어 있다. 넓은 잔디와 우람한 용수의 풍경이 잘 어우러지는 곳이다.
+81 997 92 3111

완조해변(ワンジョビーチ)캠핑장
완조해변 후방의 언덕 위에 곱게 가꾸어진 잔디 광장은 취사장, 화장실, 샤워장뿐 아니라 작은 연못 조경까지 갖추고 있다. 그늘이 없어서 한여름에는 곤란하겠지만 가을과 겨울에는 탁 트인 풍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인근에 소철 숲이 있으니 가벼운 트레킹도 가능하고, 바다에서 이것저것 잡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제프린스해변((畦プリンスビーチ)캠핑장
길이 1.5km의 산호 해변을 끼고 있는 캠핑장이다. 1972년에 현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황태자 신분으로 방문한 이후 아제프린스해변으로 불린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축제나 운동회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다목적 광장에 있고, 계단 오솔길을 넘으면 아담한 캠핑 사이트와 취사장이 나온다. 마치 프리이빗 해변을 소유한 듯 소수 정예의 오붓한 해변 캠핑이 가능하다.
+81 997 83 4111

 

글 천소현 기자  사진 김민수(아볼타)
취재협조 가고시마현 www.kagoshima-kankou.com
엔타비여행사 www.ntab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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