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의 여행의 순간] 비싼 카메라로 최고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로드리고의 여행의 순간] 비싼 카메라로 최고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 박 로드리고 세희
  • 승인 2019.08.01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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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주도
한국 제주도

사진의 정수는 탄생 이래 여전히 변함없거나 
수십 년을 단위로 아주 더디게 변하는 것들이다.

10여 년 전, 영화 촬영팀 막내로 처음 현장에서 일할 때다. 영상 스태프긴 했지만 학창시절 때부터 줄곧 사진을 찍어 왔던 터라 현장에 상주하는 포토그래퍼에게 관심이 갔다. 그의 장비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실망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프로라면 으레 가장 비싸고 성능이 좋은 모델을 쓸 줄 알았는데, 그의 커다란 가방에서 나오는 장비들은 그저 그런 중간급 모델들이었다. 이유를 물었다. 


때는 필름 시절. 북극으로 출장 갈 일이 생긴 그는 최상급 카메라 2대와 혹시 몰라서 아주 낡은 기계식 카메라 1대를 더 챙겼다. 최상급 카메라란 극한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는 방진, 방습 기능을 갖추고 충격에 강하며 배터리 역시 리튬 폴리머 소재라 성능이 더 뛰어난 카메라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정작 북극에선 그 모든 최상의 기능들이 얼어서 작동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품속에 넣어 둔 기계식 카메라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극단적인 환경에서 최상급 카메라의 성능은 무용지물이고, 체온으로 카메라를 보호해 가며 찍는 고전적인 방법만이 유효하다는 걸 몸소 알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작고 가벼운 중간급 모델만을 사용하게 됐다고 했다. 관리가 용이한 건 물론 저렴한 가격은 덤이었으니. 

미국 알래스카
미국 알래스카

카메라는 결코 프로용과 아마추어용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저 특정 모델의 카메라가 갖춘 성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예를 들어 C사의 70-200mm 줌렌즈 중 가장 비싼 모델은 조리개 최대 개방이 f2.8로 밝고 손 떨림 방지 장치도 탑재돼 있지만 크고 무겁다. 반면 가장 저렴한 모델은 조리개 최대 개방이 f4로 어둡고 손 떨림 방지 장치가 없어 조금만 어두워도 사진이 흔들리기 쉽지만 작고 가볍다. 프로들은 당연히 전자를 쓸 것 같지만, 의외로 후자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숙련된 사진가라면 촬영하는 순간의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어 흔들림을 극복할 수 있으니까. 작고 가벼운 카메라는 장시간 작업하는 데 용이하기도 하다. 득과 실이 비례하는 셈이다. 선예도와 성능이 좋은 렌즈를 쓰려면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고, 가벼운 렌즈를 선택하면 성능 면에서 다소 떨어지지만 자유와 경쾌함을 얻을 수 있다. 


카메라 업계에선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들이 쏟아진다. 개선사항은 대부분 숫자로 환원된다. 초고화소, 초고감도 등등 이미 인간의 지각 범위를 상회하는 무의미한 숫자 놀음 같기도 하다. 아이러닉하게도 요즘 영화계에선 선명도가 떨어지는 구식 렌즈를 찾기에 바쁘다. 영화 <1987>에서는 장비 렌탈 숍의 창고를 뒤져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렌즈를 일부러 찾아 사용했고 <아가씨>를 비롯한 몇몇 영화는 70~80년대에 생산된 렌즈를 해외에서 어렵게 구해 찍었다. 촬영장비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지만, 탁월한 창작자들은 오히려 덜 선명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지나친 선명함은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니까. 
  
여행할 때 내가 자주 쓰는 카메라는 중고장터에서조차 거래가 없다시피 한 오래된 카메라다. 한때 얼리어댑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새로움’을 따라가기에 지쳐 어느 날 멈췄다. 그러자 도리어 마음이 편해지면서 사진의 본질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카메라들은 최신 기술을 외치며 미친 듯 질주하고 있지만 사실 사진의 정수는 탄생 이래 여전히 변함없거나 수십 년을 단위로 아주 더디게 변하는 것들이다. 사진에서 선명해야 할 것은 화질이 아니라 주제와 분위기며, 최신 기술 또한 결코 사진 찍는 이의 역량과 직관을 넘을 수 없으므로. 낡은 카메라로 찍는다고 해서 사진의 본질적인 측면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박 로드리고 세희는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 <트래비>를 통해 여행사진을 찍는 기술보다는, 여행의 순간을 포착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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