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런던의 하늘을 보았네
그곳에서 런던의 하늘을 보았네
  • 유호상
  • 승인 2020.04.01 0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캐나다 그리고 북미 최고의 스키장이라 불리는 ‘휘슬러 블랙콤(Whistler Blackcomb)’. 
과연 명불허전, 뭐든 이름을 날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한 가지는 미처 몰랐다.

피크투피크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휘슬러산
피크투피크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휘슬러산

●반가운 반전

‘아, 나가기 싫다.’ 대망의 첫날 아침부터 이게 할 소린가 싶었다. 그것도 제 발로 스키를 타러 와서 말이다.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도, 며칠간의 활강으로 인한 근육통 때문도 아니었다. 창밖으로 장마철마냥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눈이 와도 문제긴 했다. 스키장은 숙소에서 차로 1시간 거리. 굽이굽이 언덕이 있는 편도 1차선 도로에 눈이라도 쌓이면 답이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설국의 낭만을 기대했는데 굵은 빗줄기라니. ‘왜 하필 우리가 왔을 때 기온이….’ 야속한 타이밍을 탓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빗속을 뚫고 1시간 정도 차를 몰았을까? 안개와 구름 사이로 휘슬러 빌리지(Whistler Village)가 눈에 들어왔다. 슬그머니 비에서 진눈개비로 바뀐 것 외에는 이곳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금일 우천으로 슬로프 폐장입니다.’ 혹시라도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 차에서 장비를 챙겨 슬로프로 향했다. 눈이 녹아 모래만 남은 길. 그 위를 걷는 플라스틱 부츠가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거슬렸다.

키가 큰 침엽수가 매력적인 슬로프
키가 큰 침엽수가 매력적인 슬로프

마침내 곤돌라를 타는 곳에 이르렀다. ‘질퍽한’ 기분과는 달리 화사한 표정의 스키어들로 붐볐다. 마침내 올라탄 곤돌라 창문은 습기로 가득 찼다. 온몸이 축축했다. 우선 몇 년간 굳은 몸부터 풀어야 했기에 멀리 올라가지 않고 첫 정거장에서 내렸다. 별 기대 없이 걸어 나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와우! 여긴 아래와는 딴 세상이었다. 지금까지의 좌절과 불쾌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아참, 눈이 녹다니 이런 방정맞은 소리를….

블랙콤산과 휘슬러산을 이어 주는 피크투피크 곤돌라
블랙콤산과 휘슬러산을 이어 주는 피크투피크 곤돌라

●두 산의 컬래버레이션

휘슬러 블랙콤은 두 개의 산으로 이뤄져 있다. 이름에서 암시하듯 휘슬러산(Whistler Mountain)과 블랙콤산(Blackcomb Mountain)으로 이루어진 쌍봉 리조트다. 처음 이곳에 국제적 규모의 스키 리조트를 기획한 건 196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조사단이 밴쿠버 북쪽 스쿼미시(Squamish) 일대를 찾았을 때 이곳 날씨와 입지 조건은 자격 미달이었다. 그러다 북쪽으로 한참 더 올라가 천혜의 조건을 가진 곳을 발견하고서야 단박에 ‘합격’ 도장을 찍게 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휘슬러산이다. 하지만 첩첩산중 오지였다. 1850년대 휘슬러산 지역은 그저 통로로서만 탐사됐다. 1860년 이곳을 조사하던 영국 해군은 늘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잦은 이 산을 보고 런던산(London M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 이 지역에 서식하는 설치류의 일종인 마머트가 무리 지어 내는 소리가 흡사 휘파람 소리 같았기에 휘슬러라는 별칭도 생겨났다. 훗날 스키 리조트 개발회사에서는 휘슬러라는 이름이 마케팅에 유리하다고 판단, 이름을 휘슬러산으로 바꾸었다. 

키 큰 나무들 사이를 헤치며 즐기는 크루징
키 큰 나무들 사이를 헤치며 즐기는 크루징

1980년, 휘슬러산의 맞은편 블랙콤산에는 또 다른 회사의 리조트가 문을 열고 휘슬러 리조트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재미있게도 ‘박 터지게’ 싸우던 두 리조트는 종국에 가서는 살림을 합쳤다. 블랙콤 리조트가 휘슬러 리조트를 인수, 확장하고 ‘휘슬러 블랙콤’을 만든 것. 이렇게 세계 최고 규모의 스키 종합 리조트가 탄생했다. 두 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스키장의 랜드마크는 바로 ‘피크투피크(Peak2Peak)’라 불리는 초장거리 케이블카다. 2008년 개통한 두 산 사이 곤돌라의 전체 길이는 무려 4km, 지지대 없는 케이블 거리만 3km다. 또 지지대가 없는 곤돌라로는 세계 최고 높이로 계곡 바닥으로부터 무려 436m에 이른다. 이 모든 노력에도 정작 올림픽 유치는 물 건너가고 말지만, 이후 40여 년 만인 2010년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며 휘슬러 블랙콤은 화려하게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올림픽 유치의 목적은 오로지 휘슬러 블랙콤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고 하니, 그 목적 하나만큼은 확실히 달성한 셈이다. 


휘슬러의 역사를 훑다 보니 날씨가 이 모양인 이유도, 꼭 타이밍의 문제도 아님을 뒤늦게 알 것 같았다. 밴쿠버를 중심으로 한 서부 해안 도시는 해양성 기후에 속하니,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한겨울이나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이는 날은 일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스키가 너무 오랜만이어서인지 아이를 비롯해 모두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초급 곤돌라 라인 하나 내려오는 데 하루가 마감되고 말다니. 허무했다. 내일은 날이 좀 개길 바라면서, 아니, 비만 좀 그쳐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동계올림픽 시상대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동계올림픽 시상대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몸 풀기는 위에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창문부터 내다봤다. 안개와 구름 그리고 비는 오늘도 여지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본전을 뽑아야 했던 우리의 각오는 사뭇 비장했다. 곧바로 산의 정상 근처로 오르는 장거리 곤돌라에 몸을 실었다. 어느새 폭설이 된 눈발은 괜한 불안감을 주는 와중에 수준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과감했나 하던 차. 막상 도착하니 수많은 스키어들로 북적댔고, 게다가 스키폴조차 들지 않은 스키학교의 꼬맹이들조차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조금 의외였지만 스키를 조금 타다 보니 휘슬러 블랙콤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바늘처럼 치솟은 나무들
바늘처럼 치솟은 나무들

많은 초보 스키어들은 처음에는 연습부터 하겠다고 밑에서만 머무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중간 이상으로 올라가면 오히려 슬로프가 더 넓고 완만하며 사람도 적다. 그러니 ‘몸 풀기’는 위에서 해야 할 판. 초보의 영역이라 굳게 믿고 있던 아래쪽 슬로프는 반대로 이 모든 스키어들이 전부 모이는 곳이라 더 붐빈다. 생각해 보니 이 점은 다른 스키장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곳의 슬로프가 반드시 고급 코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 정상이라 해도 마찬가지. 높은 곳에서 중하급은 능선을 따라 S자 형태로 완만하게, 상급은 직선 코스로 바로 내려오는 형태다. 


고글에는 여전히 습기가 찼지만 두터운 눈보라를 뚫고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를 가르며 내려오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을까?’ 축축했던 불쾌감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악이라 생각했던 날씨가 오히려 축복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무가 없는 정상 부근은 또 다른 분위기다
나무가 없는 정상 부근은 또 다른 분위기다

●마침내 자유가 주어지다

사흘째 날 아침, 하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파란 하늘이 보였다. 행여나 다시 구름이 몰려오기라도 할까 부리나케 차에 올라 휘슬러로 향했다. 지난 이틀간 우리가 다녔던 길이 정녕 이 길이 맞단 말인가? 구름과 안개 속에 꽁꽁 숨어 있던 눈 덮인 산맥의 장관이 푸른 하늘 아래 눈부시게 드러나 있었다. 마지막 날의 목표는 휘슬러 블랙콤의 최고 포인트였다. 고도 2,284m의 호스트만 헛(Horstman Hut)으로의 도전이다. 이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피크투피크’ 곤돌라로 고도 1,860m의  랑데부 크리스틴스(Rendezvous Christine’s) 에 오른 후 일단 슬로프를 조금 내려오다 다시 제7 헤븐 익스프레스(7th Heaven Express)라고 불리는 리프트로 갈아타고 올라야 했다. 어느 순간 휑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미로 속 벽처럼 서 있던 큰 키의 나무들이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식물조차 살기 힘든 높고 험한 수목한계선 위에 도달했다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바람도 심했다. 이젠 산 정상이라는 단어에 지레 움츠리지 않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바람 소리가 윙윙대는 정상에 이르렀을 땐 약간의 긴장감이 돌았다. 

긴 슬로프를 내려오다 만난 휴게소
긴 슬로프를 내려오다 만난 휴게소

마침내 정상에 내렸다. 리프트 스테이션 구조물에 달린 거대한 고드름과 반쯤 눈에 파묻힌 비상대피소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장엄한 주변 설산들이 모두 발아래로 내려온 그곳에서 우리를 비롯해 주변 스키어들의 표정은 긴장이 아닌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탁 트인 고지대에서 하는 활강에는 룰이 필요 없었다. 자유다. 물론 ‘권장’ 코스는 있지만 사실상 길은 의미가 없으므로 상급자들은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활강했다. 문득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들었던 ‘호연지기’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단어임에 틀림없다. 누가 겨울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말하련다. 대자연의 설산에서 기쁨을 발산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바로 스키라고! 


●휘슬러 블랙콤을 알차게 즐기는 TIP

미국 시애틀을 거쳐 휘슬러 가기 

캐나다의 스키장을 찾는데 왜 미국으로 가냐고? 한 번쯤은 시애틀에서 차를 몰고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가는 여정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시애틀은 캐나다 국경으로부터 차로 불과 2시간 거리. 가까이 있는 밴쿠버를 거쳐 휘슬러까지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물론 비행기로 밴쿠버로 바로 가면 훨씬 가깝지만, 시애틀 여행을 덤으로 하고 싶다면 시애틀 타코마 공항을 입·출국 지점으로 두는 것도 방법이다. 대한항공과 코드셰어로 운항하는 델타항공의 시애틀 노선은 오후 탑승, 오전 도착으로 스케줄이 편리하다. 
델타항공 www.delta.co.kr  

렌터카로 국경 넘기 

“뭐? 스노체인이 없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느닷없는 ‘첩보’에 부랴부랴 사실을 확인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알라모 렌터카 시애틀 지점에 따르면 차량용 체인은 없지만 사계절 타이어가 장착돼 있으니 문제가 없다고. 남쪽 지방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어 캐나다 지점에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겨울이라 해도 시애틀, 밴쿠버는 눈보다는 비가 많이 오는 곳이다. 휘슬러에 가려면 체인이 의무적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대개의 렌터카는 장착된 사계절 타이어로 충분하다. 참, 스키장비 실을 것을 감안할 때 차종은 넉넉한 SUV를 권장한다. 

또 하나! 까다로운 입국으로 악명 높은 미국이다 보니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는 것에도 온갖 억측이 많다. 하지만 미국 비자면제 프로그램(ESTA)이 있다면 입국은 할인점의 주차 정산하고 나가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다. 보통 국경 검문소로 소개되는 곳은 피스아치(Peace Arch)가 대부분인데 꼭 여기로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바로 근처에 있는 퍼시픽 하이웨이(Pacific Highway)라는 또 다른 국경 통과 지점은 캐나다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밴쿠버 시내를 우회할 때 좋다. 각 국경 검문소별 교통 상황은 미 세관 & 국경 검문소 웹 사이트에서 미리 체크할 수 있다. 
알라모렌터카 www.alamo.co.kr   
미 세관 & 국경 검문소(US Customs & Border Protection) bwt.cbp.gov

이동만 보장이 된다면, 스쿼미시 

휘슬러 블랙콤에서 스키를 즐기는 데 가장 좋은 베이스는? 두말하면 잔소리, 휘슬러 빌리지다. 숙소에서 스키를 들고 나가면 바로 탈 수 있다는 그곳. 캐나다의 다른 곳에 비해 휘슬러 블랙콤이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기반 시설과 접근성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스쿼미시(Squamish)에 머물렀다. 이유는? 휘슬러 빌리지는 너무 비싸니까. 스쿼미시는 제법 큰 타운으로 숙소, 대형마트와 각종 편의 시설을 잘 갖추고 있다. 스키 외에도 산악 트레킹, 암벽타기, 보트 등의 아웃도어 활동의 베이스이기도 하다. 휘슬러 빌리지에 비해 거의 절반 수준의 비용으로 빌릴 수 있는 현지인 집을 에어비앤비 등을 통해 예약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스키 및 보드 등의 장비 렌탈 서비스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보통 예약은 받지 않으며 전날 저녁 5시 이후 대여할 수 있고, 반납도 다음날 오전 9시 전까지 하면 된다. 차만 있다면 굳이 휘슬러 빌리지에서 더 비싸게 빌릴 이유가 없다. 
스키 렌탈│어번알파인 www.urbanalpine.com/rentals

 

봄에도 스키는 계속된다, 휘슬러 블랙콤 

세계적인 명성만큼이나 이곳 리프트 티켓 가격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 다른 스키장에 비해 이곳은 이용 기간 할인혜택 기준도 높다. 하지만 무선주파수인식(RFID) 기술을 채용한 리프트 티켓 덕분에 리프트를 탈 때마다 티켓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든가, 엄청난 규모의 슬로프를 커버하는 곤돌라를 경험해 보면 그 가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론 스키를 타지 않고 곤돌라만 타고 절경을 감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리프트 운영 시간은 아침 8시30분~오후 3시30분 전후로(월별로 조금씩 다름) 마감이 이른 감이 있지만 슬로프 자체가 바로 폐쇄되는 것은 아니다. 휘슬러에서는 4~5월까지도 일명 ‘봄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슬로프가 위치한 산악지대의 고도를 보면 역시 이해가 간다. 어쩌면 극명한 대비를 즐길 수 있는 봄 스키가 차라리 더 짜릿할지도 모르겠다.
휘슬러 블랙콤 www.whistlerblackcomb.com

 

글·사진 유호상  에디터 김예지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중구 무교로 16, 5층 (주)여행신문
  • 대표전화 : 02-757-8980
  • 팩스 : 02-757-898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전홍렬
  • 법인명 : (주)여행신문
  • 제호 : 트래비 매거진
  • 등록번호 : 서울 라 00311(2009-10-13)
  • 발행일 : 2005-05-30
  • 발행인 : 한정훈
  • 편집인 : 김기남
  • 트래비 매거진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0 트래비 매거진.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ktt@traveltime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