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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되면 남해로 창을 내겠소

  • Editor. 천소현
  • 입력 2023.05.0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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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생애전환기’라는 게 있다면, 그때 받아야 하는 건 건강검진뿐만이 아니다. 인생의 변곡점에서 혹은 터닝 포인트에서 우리에게는 여행이 꼭 필요하다. 이번 여행은 4050 여성의 이름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내게 이 여행이 필요했다는 걸, 반환점에 가까워보니 알겠다.

●갱년기 그리고 보물섬 남해

갱년기요? 곧 다가올 먹구름 예보를 들은 기분이긴 했다. 내 할머니와 어머니,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겪고 있을 이 위기는 대부분 겪는 통과의례라는 이유로 사회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유난히 심하게 갱년기를 앓으셨던 어머니의 아들이자, IT 개발자에서 항공사 승무원으로 전직했던 독특한 이력의 청년 창업자인 허정 (주)바바그라운드 대표는 4050 중년여성들만을 위한 여행을 기획해 ‘노는법’이라는 APP를 출시했다.

중년 여성들을 위한 여행지라면 남해가 최고라며 남해군과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으로 나섰고 남해문화관광재단과 바바그라운드와 함께 여행코스를 개발했다. 4박 5일 여행의 이름은 ‘남파랑길 웰니스 테라피 스테이 in 남해바래길’이였다.

출발하기 전에 몇 번이고 해남과 헛갈릴 만큼 마음의 거리가 멀었던 남해는 ‘여전히’ 불편한 교통편 덕분에 ‘여전한’ 풍경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하지만 한가하게 아름다움만을 칭송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소멸이라는 문제에 당면해 있었다. 다행인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 먹먹한 고즈넉함이 누군가에게는 여백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인구 소멸을 막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청년이든 귀농이든) 이주가 아니라 관계인구 증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답은 여행에 있다.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살피게 되므로. 10여 명의 4050 여성들이 촉촉한 봄날의 아침에 남해로 출발했다.

●앵강다숲 요가와 바래길 노르딕워킹

굳이 남해까지 가서 요가를? 요가, 노르딕 워킹, 명상(마음공부)로 짜인 4박 5일간의 일정표에서 떠올랐던 의문은 남파랑길여행지원센터 윤문기 팀장을 만나고 나서 해소되었다.

©바바그라운드
©바바그라운드

여행작가이자 걷기 코스 개발자인 그는 현재 남해관광문화재단에서 바래길 운영을 총괄하는 팀장이자, 요가와 노르딕 워킹 지도자이기도 하다. 남해 여행의 아침은 남해워킹테리피센터(남파랑길여행지원센터 2층)에서 매일 그와 함께하는 요가와 노르딕 워킹으로 시작되었고, 오후에는 명상 강의와 실습으로 이어졌다. ‘집에 돌아가서도 스스로 할 수 있도록’이라는 목표가 확고했던 만큼 걷기 치유 스테이의 일정은 꼼꼼했다. 남해여서, 윤팀장이어서, 4050 여성이어서 가능했던 웰니스 여행은 세라토닌 분비를 조금씩 촉진시켜 나갔다. 쉽게 말해 스트레스에 견딜힘을 늘려 주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루틴이었다. 오전 8시면 어김없이 요가가 시작되고, 요가 후에는 간단한 샐러드나 샌드위치 조식을 먹었다. 오전 시간은 스틱을 꼭꼭 눌러가며 굽은 등과 허리를 펴는 노르딕 워킹에 집중했고, 매일 5,000~1만 보씩 쌓은 그 걸음들로 남해 바래길 10코스를 조금씩 섭렵해 나갔다.

바다를 조망하는 총 240km의 남해바래길은 이 섬의 풍경과 삶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일이었다. 아직도 현역으로 논밭에 물을 대고 있는 수로 위를 걷거나, 미국마을, 스페인마을처럼 이국적인 마을을 관통하는 것도 남해의 길만이 가진 매력이다. 루틴조차 가질 수 없는 일상, 루틴이 망가진 날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기 위해 남해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남해의 재발견
보물섬을 걷는 이유

남해의 별칭이 ‘보물섬’이라는데, 매일 오후 우리가 찾아낸 보물의 이름은 섬이정원, 창선 별해로, 물건 방조어부림 등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내가 남해의 명소로 만났던 다랭이마을, 독일마을과는 또 다른 광채를 품고 있었다.

©바바그라운드
©바바그라운드

한 사람의 영혼이 거름으로 뿌려진 경상남도 민간정원 1호 ‘섬이정원’은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돋보이게 하는 신기한 조경미를 가졌다. 다랑논의 돌담을 오롯이 살려서 수문과 연못이 있는 9개의 정원을 가꾸었다. 걸어가며 보는 풍경과 되돌아보는 풍경이 다르기 때문에 가끔은 되돌아봐야 한다는 차명호 대표의 말은 생애전환기에 대처하는 모든 사람이 기억해 둘 이야기다. 식물을 만지는 일이 너무 좋아 어둔 밤 전구 빛에도 삽은 든다는 그의 열정은 20대뿐 아니라 40대, 50대도 ‘덕질’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준다. 

봄날의 남해는 계절의 선물을 부려놓았다. 남해에 연결된 또 하나의 섬 창선도에는 고사리밭 언덕 위의 전망대와 쉼터인 별해로가 조성됐다. 제철이 되면 푸른 고사리로 뒤덮인 언덕의 모습이 마치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닮았다는데, 수확이 끝난 모습도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남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인 독일마을을 거쳐 도착한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은 오직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여린 초록빛에 휩싸여 있었다. 물고기를 불렀던(어부) 숲은 이제 연인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고, 큼직한 몽돌이 가득했던 해변은 모래와 뒤섞여 평평해지고 있었다. 한번 들어온 물고기는 절대 나갈 수 없다는 죽방렴이 여전히 활발하게 남해 지역의 어업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남해도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으로 마음을 옭아맸다. 

다랭이마을에서는 밤의 순례자가 되었다. 수백 년에 걸쳐 설흘산(499m) 아래 일군 다랑논은 척박한 해안사면에 층층이 그려 놓은 이 마을의 터무늬다. 이것을 그저 아름다운 풍경으로 읽는 무례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밤이라는 시간이 더 적당했던 것 같다.

해 질 무렵 남해 다랑논 길을 행렬하는 ‘달빛 걷기’ 랜턴의 궤적은 춤추듯 유연했고, 불빛이 일렁거릴 때마다 모두의 호흡도 조용히 오르내렸다. 이 나이가 좋은 건 희미한 곳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눈을 감고도 파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달빛 걷기 이끔이의 이야기 속에는 다랭이마을 소개가 아니라 다랭이마을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쁨이 가득했고, 그 기쁨에 공진하는 원주민과 이주민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진짜 몰랐던 건
남해의 맛

몰라서 기대하지 못했던, 그래서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은 남해의 먹거리였다. 남해 미식의 대명사인 멸치쌈밥, 모두가 감탄했던 전복물회집 외에도 믿을 수 없는 가성비의 백반집과 간판 없는 식자재마트 주차장 떡볶이집,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 사우어맥주를 만든다는 네코나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 해 감동스토리를 전해 주었던 행복베이커리, 가구디자인 브랜드 브라운핸즈의 손길이 닿은 복합문화공간 ‘라비키움 남해’ 등을 거치면서도 밤마다 펜션 앞 벤치에서는 맥주파티가 빠지지 않았다.

사실 남해 여행 참가자들은 출발 전에 연속혈당측정기를 팔에 부착했었다. 의사 출신으로 스스로 비만과 당뇨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 창업을 하게 되었다는 양혁용 대표에게 혈당관리에 대한 강의를 들은 후 동전만한 크기의 센서를 팔에 부착하고 2주 동안 혈당을 꾸준히 체크하는 체험이었다. 수시로 ‘글루코핏’ APP을 통해 좀 전에 섭취한 탄수화물이, 술이, 과식이 혈당에 미치는 영향을 실시간 그래프로 보면서 식습관을 점검해 나갔다. 하지만 솔직히 남해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과식과 과음을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순간을 맘껏 음미했다. 과잉된 칼로리는 밤마다 총량을 넘어섰던 대화와 폭소에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바바그라운드
©바바그라운드

●남해에서 창 너머
경계를 넘는 그들에게

인생 선배들의 파란만장한 경험담은 두려움 너머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50대 중반이 넘어 시니어 모델에 도전했고, 하루하루가 재미있다는 시니어 모델 두 분은 노는법 APP의 초기화면에 등장하는 모델이다. 방송작가에서 마음치유 활동가로, 마음의 벽을 깨는 고작(닉네임)님 덕분에 남해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나는 묵은 눈물을 시원하게 배출할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에서 사이클 메달리스트였던 20대를 공개해 모두를 놀라게 했던 K씨는 여전히 주말마다 사이클을 타는 슈퍼 건족의 중년여성이었다. 그녀를 포함해 대기업에서 오랜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전직을 준비하는 베테랑 Y씨와 그들을 지원하는 일을 업무로 맡고 있는 N팀장에게 남해는 새로운 가능성의 장소가 되었다.

​©바바그라운드​
​©바바그라운드​

각자 인생의 바퀴를 굴려 반세기를 살아온 이 여성들과 함께 남해를 여행해서 영광이었다. 그곳에서 마음의 창 하나가 열렸다. 살짝 바라본 또 다른 반세기의 풍경이 이렇게 열정적이고, 건강하고, 웃음으로 가득하다니, 이보다 더 큰 힐링이 없다.


*원고의 제목을 정하며 1934년 발표된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떠올랐다. 전원생활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왜 사냐건 / 웃지요.’

 

▶남해 바래길

남해 섬 전체를 종주하는 총거리 약 240km(본선 16개, 지선 4개)의 코스순환형 종주길로, 코리아 둘레길(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 중에서 남파랑길과 겹치는 코스가 11개다. 각 코스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숙소를 베이스캠프로 정하면 편리하게 완보할 수 있다. 남해 바래길탐방안내센터에서 지도 등 자세한 정보를 구할 수 있으며 코스 안내 및 완보 인증 등은 간편하게 APP을 이용하면 된다.

 

▶남파랑길 여행지원센터

남해 앵강만 해안가 자리한 앵강다숲마을에 몇 년간 유휴공간으로 비어있던 건물을 활용해 지난해 문을 열었다. 1층은 남파랑길 홍보관, 2층은 남해워킹테라피센터, 3층은 남파랑길여행자라운지다. 3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앵강다숲과 연못, 그리고 남해 금산의 풍경이 일품이다. 남해문화관광재단에서 요가, 노르딕워킹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글 천소현 트래비 객원기자,  사진 천소현, 바바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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