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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근대를 품은 역사기행 '우정총국 터에서 정독도서관까지'

  • Editor. 장태동
  • 입력 2023.09.2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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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천하 갑신정변의 현장, 우정총국 터

사람들로 분주한 도심 속 절, 조계사. 종각역 네거리와 안국동 네거리 사이 차들로 분주한 우정국로 도로. 그 분주함 속에 도심 속 절보다 한갓진 곳이 있으니, 수백 년 묵은 회화나무 고목이 마당을 지키고 있는 우정총국 터가 그곳이다. 

우정총국 터에 있는 회화나무 고목
우정총국 터에 있는 회화나무 고목

절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은 절만 바라보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바쁘다. 회화나무 고목 옆 의자에 앉은 노인 몇 명의 눈길은 허공을 향한 것인지 회화나무 고목을 보는 것인지... 핸드폰에 연결 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공중에 뜬 눈길은 하염없다. 

찻소리에 힘이 빠진 고즈넉함을 북돋우는 건 회화나무 고목에서 피워낸 초록의 생명이다.  저 나무 한 그루가 옛 우정총국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한다. 생명이 있는 것들 중 살아서 그날을 증거하는 것은 오직 저 회화나무 고목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884년 12월4일 밤 우정총국 낙성식에서 반대파인 수구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했던 개화당의 목숨을 건 한 수, 갑신정변의 현장에 바로 저 회화나무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날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날 밤 우정국에서 낙성식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도 우영사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과 각궁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

개화당은 수구파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시작했고, 수구세력은 갖은 방법으로 난국을 돌파하려했다. 

둘째날(12월5일), 수구세력은 계책을 마련했다. 고종과 명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모신 후 청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셋째날(12월6일), 수구세력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창덕궁에 있던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가 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철수했다. 궁궐에는 개화당 생도와 조선군만 남았다. 중과부적이었다. 개화당 세력이 감당키 어려운 싸움이었다. 개화당의 계획은 3일 만에 끝났다. 

이렇게 3일. 개화당의 정변은 실패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삼일천하’라 했다. 


●우정총국 터에 들어선 체신기념관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은 본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탔다. 일제강점기에는 중동학교 등으로 쓰이다가 광복 이후 철거 대상이 되었는데 1956년 체신부가 매입하면서 철거되지 않았다. 1972년부터 체신기념관으로 사용됐다. 지금도 우리나라 체신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정총국 터에 들어선 체신기념관에 전시된 '경성내 우정집신분전 구역도. 우표판매소와 집배구역도를 표시했다.
우정총국 터에 들어선 체신기념관에 전시된 '경성내 우정집신분전 구역도. 우표판매소와 집배구역도를 표시했다.

체신기념관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경성내 우정집신분전 구역도’다. 근대의 우정 업무가 시작 되면서 서울에 있는 우표판매소와 집배구역도를 표시한 지도다. 종로, 동대문, 남대문 등 서울 시내 10곳에서 우표를 팔았다. 같은 곳에 우체통도 설치 됐었다. 한양 도성의 성곽과 도로, 마을 이름, 산과 물길 등도 확인 할 수 있다. 

전시된 사진과 문서, 기록으로 당시 우정총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및 여러 종류의 우표, 우정 일에 쓰이던 도구들도 살펴볼 수 있다.     

 

●‘열린송현’ 어제와 오늘 

옛 우정총국 터에 있는 체신기념관을 돌아보고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명, 김옥균의 집이 있던 정독도서관으로 향했다. 안국동 네거리에서 길을 건너 서울공예박물관 골목으로 들어가는 첫머리에 ‘열린송현’이라는 이름이 붙은 들판이 펼쳐졌다. 

서울 도심의 중심에서 건물 하나 없는 들판을 볼 수 있는 건 행운이다. 들풀과 어우러진 꽃들이 가을을 부르는 바람에 너울거린다. 인왕산과 백악산(북한산) 능선을 한 눈에 넣을 수 있다.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

‘하늘소’라는 이름의 전망대가 설치됐다. ‘하늘소’는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 조병수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안내판에 적혀있다. 하늘소(전망대)에 올라 360도를 돌아보며 전망을 즐긴다. 인왕산, 백악산(북악산), 주변 도심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우천, 강풍, 폭염, 태풍 등 기상 상황과 유지보수 및 안전점검을 할 때는 출입을 통제 한다.)   

'열린송현'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열린송현 들판에 하늘소(전망대) 설치물이 보인다.(사진 왼쪽)
'열린송현'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열린송현 들판에 하늘소(전망대) 설치물이 보인다.(사진 왼쪽)

‘하늘소’에서 내려와 ‘열린송현’ 들판 곳곳에 난 길을 걸으며 산책을 즐긴다. ‘송현’은 조선시대에 소나무가 숲을 이룬 고개였다. 그래서 솔고개, 송현으로 불렸다. 들판 한쪽에 아주 작은 언덕도 만들었다. 조선시대 이 언저리에 있던 ‘송현’을 상징하는 듯 했다. 언덕 뒤로 도심의 빌딩숲이 보이고 빌딩 위 하늘에는 낮달이 떴다. 조선시대 ‘송현’의 하늘에도 떴을 저 낮달, 조선 개국 이후 격동의 역사, 그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에서 본 풍경.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한 눈에 보인다.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에서 본 풍경.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한 눈에 보인다.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에서 본 풍경. 사진 오른쪽 위가 안국동 사거리다.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에서 본 풍경. 사진 오른쪽 위가 안국동 사거리다.

송현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과 뜻을 같이 했던 남은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이방원(훗날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정도전과 그 세력들을 제압한 곳이 송현에 있던 남은의 거처였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으로 다스리는 왕의 나라를 꿈꾸었고, 정도전과 그 세력들은 왕을 모시되 신하들이 이끌어가는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양립할 수 없던 팽팽한 긴장은 이방원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에서 본 풍경. 백악산(북악산)이 보인다
열린송현 하늘소(전망대)에서 본 풍경. 백악산(북악산)이 보인다

당시 송현은 지금의 종로구청 뒤에서 ‘열린송현’에 이르는 지역 어디쯤으로 알려졌다. 종로구청 자리는 정도전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종로구청에 ‘작은도서관 삼봉서랑’이 있다. 삼봉은 정도전의 호다. 

'열린송현' 조선시대 송현을 상징하는 듯 작은 언덕을 만들었다.
'열린송현' 조선시대 송현을 상징하는 듯 작은 언덕을 만들었다.
열린송현.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열린송현.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리 저리 난 ‘열린송현’ 들판 길을 다 걷고 나서다가 한쪽 입구에 세워둔 안내판을 보았다. 이곳이 1910년대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윤덕영 일가가 살았던 곳이며, 1920년대에는 조선식산은행 사택 건물이 있었던 곳이고, 광복 이후 40여 년 동안 미국대사관 직원숙소 건물이 있던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감고당길을 걷다 

‘열린송현’을 지나 율곡로3길을 걸었다. 도로명 율곡로3길의 또 다른 이름은 ‘감고당길’이다. 2015년 12월28일에 부여된 명예도로명이 ‘감고당길’이었다.  

율곡로3길. 길거리
율곡로3길. 길거리

그 길에 있는 덕성여자고등학교는 조선시대에 숙종 임금의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의 친정집이 있던 곳이다. 여기서 인현왕후와 악연으로 얽힌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장옥정이었다. 장옥정은 숙종 임금의 세 번째 왕비다. 장옥정은 숙종 임금의 대를 이은 경종 임금을 낳았다. 인현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가로 쫓겨나게 된다. 역사는 격동했고,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인현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장옥정은 인현왕후의 죽음에 연루됐다고 해서 사사됐다. 인현왕후 민씨가 서인으로 강등되어 머물렀던 집 이름이 감고당이다. 감고당이란 이름은 영조 임금이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리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감고당길에 있는 한 사진관
감고당길에 있는 한 사진관
감고당길 골목 풍경. 다양한 라면을 맛볼 수있는 식당 간판이 빨갛다.
감고당길 골목 풍경. 다양한 라면을 맛볼 수있는 식당 간판이 빨갛다.

●옛날 것과 지금의 것이 잘 어울린 정독도서관 가는 길

덕성여고 앞을 지나 정독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옛 것과 지금 것이 어울린 길이다. 약 120m 정도 되는 길과 양 옆으로 난 좁은 골목까지, 한옥과 한옥 골목, 그리고 한옥 마을의 운치가 남아 있는 곳에 벽화며, 요즘 유행하는 길거리 먹을거리, 전시를 볼 수 있는 곳, 장신구 파는 집, 찻집과 밥집이 잘 어울렸다. 그 덕에 이 길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덕성여자고등학교 앞을 지나 만난 벽화가 그 길의 첫머리다. 노부부의 사랑스런 입맞춤을 표현한 벽화는 원작자인 그래피티 벽화 작가 원영선 씨의 재능기부로 이루어졌다는 안내문구가 벽화 옆 아래에 적혀있다. 주민들도 사랑하는 벽화라는 평도 함께 적혀 있는데, 오가는 젊은 청춘들의 눈길도 사로잡는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신영부동산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신영부동산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신영부동산중개개설사무소도 있다. 서울미래유산 자료에 따르면 1968년에 개업해서 지금까지 대를 이어 부동산업을 잇고 있으니 이 골목, 이 마을 역사의 증거인 셈이다.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

골목 한쪽에서는 파란 천막으로 울타리를 치고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문화재 발굴조사 현장이다. 옛것을 찾아 보존하고 현재의 것을 어울리게 만들어나가는 일이 시작되는 현장인 것이다. 

정독도서관 건물 안에서 본 도서관 정원과 남산
정독도서관 건물 안에서 본 도서관 정원과 남산

드디어 정독도서관이다. 정독도서관은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중등학교로 건립된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군 통신부대가 사용하기도 했다. 

정독도서관에 있는 김옥균 집터 푯돌
정독도서관에 있는 김옥균 집터 푯돌

경기고등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 김옥균이 살던 집이 있었다. 정독도서관 너른 정원 잔디밭 한쪽에 김옥균이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푯돌에서 멀지 않은 곳에 300년  넘은 회화나무도 보인다. 김옥균이 이곳에서 사는 모습을 지켜봤을 회화나무 고목이다.  

정독도서관에 있는 300년 넘은 회화나무
정독도서관에 있는 300년 넘은 회화나무
고려시대의 우물로 추정하는 우물돌. 정독도서관 야외에 있다.
고려시대의 우물로 추정하는 우물돌. 정독도서관 야외에 있다.

언제나 고즈넉하고 푸근한 풍경이지만, 벚꽃 피는 봄날에 보는 정독도서관 풍경이 백미다. 오래된 건물과 어울린 고목, 그 풍경에서 피어난 새봄 새하얀 ‘꽃사태’... 옛 것과 새것, 역사와 현재가 어울려 빛난다.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

글·사진 장태동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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