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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이클로톤, 전설의 7146번

  • Editor. 강화송 기자
  • 입력 2024.01.05 06:30
  • 수정 2024.01.05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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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1, 출발. 아! 7146번 참가자. 
정말 독보적인 레이스를 펼칩니다.

●자전차왕 엄복동의 마음가짐

필자, 지금 진지하다. 홍콩에서 열린 사이클로톤(Cyclothon) 대회에 참가했다. 자전차왕 엄복동의 마음가짐으로, 쓰러질 때까지 달리고 말 것이다. 홍콩 사이클로톤은 홍콩관광청이 주최하고 선훙카이(新鴻基, 아시아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가 후원하는 자전거 대회다. 대회라는 게 꼭 경쟁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프로 선수부터 자전거 동호인, 일반인, 여행객 등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통과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캐주얼한 행사다. 하지만 스포츠라면 ‘경쟁’이 묘미인 법. 누구든 경기 내내 나의 뒤통수만 보게 될 것이다. 코스는 50km, 30km, 10km(Family Fun Riding) 중 선택할 수 있다. 30km 코스를 선택했다. 

침사추이 엠파이어 센터에서 출발해 칭콰이 고속도로(Tsing Kwai Highway)를 타고 청칭 터널(Cheung Tsing Tunnel)을 거쳐 반환점을 찍고, 스톤커터스 다리(Stonecutters Bridge)를 건너 침사추이 1881 헤리티지 앞에서 끝나는 코스. 글로는 참 복잡한데, 표지판 따라 달리면 된다. 필자의 참가 번호 7146번, 전설이 될 번호다.

하필 30km 경기 시작시간이 아침 8시. 본인, 완벽한 저녁형 인간이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기록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분명 아침 때문일 거다. 그래도 3대(벤치프레스 & 데드리프트 & 스쿼트) 450kg을 드는 남자. 30km 정도는 숨쉬기보다 쉽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빌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자전거 브랜드였는데, 유난히 푹신한 승차감의 MTB(산악자전거)였다. 이 녀석(자전거)과 나는 오늘 홍콩 사이클로톤의 새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높은 확률로 1등을 할 거 같은데, 결승점을 통과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까. 생각만 해도 실소가 나온다. 드디어 출발선에 섰다. 다들 나를 견제하는 것만 같지만 이겨 낸다. 3, 2, 1. 경기 시작. 

이 운동, 기세가 99%다. 초장에 치고 나가야 한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는다. 허벅지가 타들어 가는 느낌, 이 맛에 내가 자전거를 탄다. 우선 내 계획은 이렇다. 초반 10km 구간은 시속 30km를 유지하고, 중간 10km 구간은 시속 20~25km, 나머지 10km는 모든 걸 쏟아 부을 것이다. 하여간 혼자 놀고 있다. 

경기 시작 10분째, 현재 시속 12km. 순위 꼴등. 여기서 꼴등이란 단어는 비유가 아니다. 몇천 명이 참가한 글로벌 행사, 사이클로톤의 꼴등이 놀랍게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어느 국민이었다는 사실, 이건 몰랐지. 범인도 나고, 증인도 나다. 사람은 인위적인 장치 없이 지구를 벗어날 수 없다.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중력을 잊고 살아간다. 그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적응한 것이다. 우리가 중력을 느끼려면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몸을 노출시키면 되는데, 이를테면 타이어가 터진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든지 뭐, 그런 미련한 상황 말이다.

 

●7146번 참가자, 독주를 시작합니다

출발 전에는 자전거가 이렇게 푹신할 수도 있었구나 싶었다. 출발 후에는 자전거가 이따위로 말랑하면 안 되는구나 싶었고. 페달을 밟으면 바퀴가 숨을 쉬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처절히 페달을 눌렀고, 그때마다 뒷바퀴는 미친 듯이 숨을 내쉬었다. 심정지한 자전거를 나의 황금 허벅지로 인공호흡 해 기어코 살려 낸 이 시대의 의인, 그것이 필자다.

처음엔 그나마 곡선이었던 바퀴가 이젠 직선이다. 솔직히 달리지 않아도 자전거가 혼자 설 수 있을 정도였다. 끈끈이에 앉아 손만 비비고 있는 파리가 이런 기분일까. 무력하다. 세상이 이렇게 끈적했나. 하지만 필자, 포기를 모르는 사람. 연배 그윽하신 어르신 한 분을 기적처럼 제쳐 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현재 순위 뒤에서 2등. 이렇게 쓰러질 내가 아니다. 어르신은 철물점 앞에서나 볼 듯한 고물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필자의 미친 듯한 허벅지 출력에 놀라서였을까. 스쳐 가는 내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유(You)! 타이어(Tire)! 룩(Look)! 저도 알고 있어요.

자존심 하나로 10km를 달렸다. 잠시나마 극적으로 제쳤던 어르신은 진작 가고 없다. 있을 때 잘할 걸. 1등은 참 고독하다. 물론 뒤에서.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홍콩 사이클로톤 코스는 대부분 평지 같은 오르막이다. 경주 내내 목성의 중력(지구의 2.528배)을 견디며 끝없는 오르막은 올랐는데, 그 경사도가 내 성실함을 갉아먹는 주말 아침 같았다. 한없이 게을러졌고, 몸이 나른하다 못해 잠이 몰려왔다. 조난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시그널을 몸소 경험하며 여전히 난 발을 구르고 있었다. 왜 죽기 직전에 못 먹은 것이 생각날까, 못 이룬 것이 생각날까. 못 먹은 것이 생각나서 그만하고 완탕면이나 먹으러 가야지 싶었다. 내가 지나간 자리만 장마철이 한창이다. 땀에 젖은 아스팔트를 사각형 바퀴가 두텁게 가른다. 헨젤과 그레텔이 이 자전거를 탔으면 최소한 길은 안 잃어버렸다. 앞에 터널이 보인다. 딱 이것만 지나 보자. 그렇게 15km 반환점 도착.

이젠 뭐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뿐이다. 기적이 놀라운 이유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기 때문 아닐까? 아직 다리가 움직인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데 머릿속 왼편에 한 명, 오른편에 한 명이 떠오른다. 왼편에는 홍콩관광청의 H실장이 등장했다. 오른편에는 오늘 아침 내게 자전거를 빌려 준 소녀의 얼굴이 등장했고. H실장은 ‘사이클로톤은 자전거만 탈 수 있으면 누구나 완주할 수 있다’라고 내게 강력히 조언했다. H실장은 사이클로톤에 참가한 적이 없단다. 자전거를 빌려 준 소녀는 ‘이 자전거는 원래 푹신하다’라며 날 부드럽게 설득했다. 그 소녀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그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자. 나쁜 상황만 있을 뿐이지, 나쁜 사람은 없으니까. 해탈의 경지에 이르며 20km 지점 도착. 

이쯤 되니 누가 날 좀 말려 줬으면 한다. 기꺼이 더 탈 수 있다고, 꼭 결승점에 들어가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깔끔히 포기해 줄 테다. 오토바이를 탄 안전요원이 내 주변에 붙어 타이어를 보라고 자꾸 소리친다. “7146번, 짜요(加油, 힘내)!” 보통 안전요원이라면 해결책을 제시해 줄 의무가 있지 않나. 타이어가 터진 걸 잊고 싶은데, 자꾸 따라오며 복기시킨다. 그래도 그에게 또우제(多謝, 감사합니다)라며 웃어 보인 인품을 갖춘 남자. 짜디짠 미소와 함께, 짜요…. 7146번 화를 참았다.

●1시간 47분, 처절한 생존 

홍콩 사이클로톤은 코스 중간중간 전문 사진가들을 배치해 참가자들의 라이딩 모습을 촬영해 준다. 대회가 끝나면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참가 번호를 입력해 무료로 사진을 다운받을 수 있다. 보통 25km 지점에서 하이라이트 사진을 촬영하는데, 무려 사진가 4명의 렌즈에게 조준을 당했다. 압도적인 1등이었기 때문이다(기준은 내가 정함). 하필 그 촬영 구간이 또 오르막이다. 현재 시속 8km. 나를 찍다 찍다 지쳐 버린 사진가들의 표정이 굳어 간다. 아직도 나는 사진가들을 지나치지 못했다. 사진이 찍히고 싶어 안달난 참가자라고 생각하나 보다. 셔터 소리가 나질 않는데, 다들 카메라만 만지작거린다. 곧 생을 마감할 것 같은 나의 숨소리, 바람 빠진 바퀴가 뽀득거리는 소리, 애타게 감기는 자전거 체인 소리. 내 일평생 이렇게 고요하고 어색한 홍콩은 또 처음이었다.

27km, 결승점까지 단 3km만 남겨 둔 채 타임아웃. 1시간 47분간의 처절한 라이딩이 여기서 끝이 났다. 멈춰선 곳은 홍콩 국제상업센터(ICC). 108층부터 118층까지 리츠칼튼 호텔이 들어서 있는 건물이다. 낙오자라면 반드시 이 건물 내부를 거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한다. 건물로 들어서니 양복을 입은 이들이 히죽거리며 나를 구경한다. 푸바오가 이런 기분일까. 두 손 공손히 모아 빕숏(Bib Shorts, 자전거 쫄쫄이 바지)의 포춘쿠키 위에 살포시 얹는다. 

회수차에 오르니 긴장이 풀린다. 회수차는 자전거 대회에서 시간 내 완주하지 못했을 경우 탈락자와 자전거를 회수하기 위한 대형 버스다. 홍콩 사이클로톤 회수차는 왼쪽 2열, 오른쪽 3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른쪽 좌석의 풍경이 좀 더 좋다. 세계 최초 홍콩 사이클로톤 회수차 리뷰. 

나를 포함한 15명이 회수차에 있었다. 그중 남자는 4명. 머리숱이 온전한 사람은 필자 한 명. 내가 유일하게 제쳤던 할아버지는 맨 앞자리에 앉아계셨다. 회수차는 낙오자를 침사추이역에 내려 준다. 차에서 내리면 현장 요원들이 낙오자들에게 인증사진을 요청한다. 자전거가 섞이거나, 분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참가 번호와 참가자의 자전거가 반드시 한 사진에 나와야 한다. 낙인 같은 인증사진을 찍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차찬텡에 들러 완탕면과 밀크티, 토스트, 닭고기가 올라간 라면, 토마토 라면, 파인애플 빵, 또 뭐였지…, 하여튼 음식을 주문했다. 운동 후라 최대한 자제해서 먹기로 한 것이다. 

어쨌든 한 번의 실패와 영원한 실패를 혼동하지 말자. 인생은 오늘의 나 안에 있고 내일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또 좋은 말이 뭐가 있지…, 아! 좌절과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디딤돌이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 어떻게 장미꽃을 모을 수 있을까. 하늘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빛나길 바란다면 그 또한 별이 될 것이다. 7146번 참가자, 홍콩 사이클로톤 대회 참가 완료. 최종 순위 1등(기준은 내가 정함). 필자, 반드시 내년 홍콩 사이클로톤으로 돌아오겠다. 그땐 지금과는 좀 다른 결과일 것이다. 당당하게 1등으로 들어와 인터뷰를 하게 되겠지. 그때 이 치욕스러운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려야겠다. 필자, 지금 진지하다. 

 

▶Editor’s Pick  

서구룡 문화지구, 스마트바이크

홍콩에서 자전거를 스포츠 아닌 레포츠(레저 스포츠)로 접근하고 싶다면 ‘서구룡 문화지구’가 제격이다. 서구룡 문화지구는 바다에 흙을 메워 새롭게 만든 간척지다. 2019년부터 전시장, 미술관, 공연장 등 예술 관련 문화시설이 이곳에 속속 들어오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M+ 뮤지엄, 홍콩 고궁박물관, 시취센터 등이 있다. 산책로를 따라 ‘아트 파크(Art Park)’가 조성되어 있다.

스마트바이크(SmartBikes)는 서구룡 문화지구에서만 이용 가능한 자전거 대여 서비스다. 가족끼리 이용하기도 좋다. 4인 가족이 함께 탈 수 있는 ‘패밀리 바이크’도 대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3~5세의 어린이에게 적합한 4발 자전거부터 성인용 자전거까지, 다양한 선택지를 갖추고 있다. 모든 자전거는 2시간 단위로 대여가 가능하다.

 

글·사진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홍콩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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