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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은희경 - “여행이란 유연함을 위한 삶의 변주곡 ”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7.07.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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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

신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타인에 대한 애정과 온기로 가득한 소설집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더 이상 성장키를 거부한 열두 살 소녀를 필두로 매 작품마다 위악과 냉소를 일삼던 그의 페르소나들은 꾸역꾸역 삶을 예찬하고, 타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집필을 앞두고 늘 여행을 떠난다는 그녀의 오랜 습관에 미루어 보건데, 이 반가운 변화의 중심에 ‘여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두터워 보인다. 그녀의 다양한 변주곡을 ‘경청’하는 동안 우리는 보다 유연하고 발랄해진 ‘여행자 은희경’과 만나게 된다. 

글  박나리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곽은정

자연스레 층진 단발머리, 에스닉한 티셔츠를 가벼이 차려입은 그녀를 만난 곳은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였다. “죄송해요. 제가 좌담회 일로 막걸리를 좀 마셨어요.” 작고 여린 음성 아래 달아오른 두 뺨을 매만지는 이는 영락없는 스무 살 소녀다. 첫 만남의 어색함쯤이야 음주와 관련된 몇 마디 농담에 이내 사그라지고, 나는 곧 여행이란 공통분모로 서로를 묶기 위해 최근의 여행담을 청한다. 

“친한 작가들과 도쿄에 다녀왔어요. 천운영, 원성희씨를 포함한 멤버가 5명이라 일명 ‘독자매’로 불리는데(웃음)… 이것저것 볼거리가 가득한 도시더라고요. 그 뒤론 내내 원주 토지문학관에 머물다 며칠 전 올라왔죠.”  

물 흐르듯 쏟아지는 근황 속에는 낯선 도시들의 흔적이 빼곡히 묻어난다. 경험을 통해 소재를 찾는 그녀에게 여행은 중요한 산물이다. 이번 신작 역시 그랬다. 6개의 단편 가운데 조금이라도 자기 경험이 들어가지 않은 작품은 없다. 작가는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고통스런 창작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믿는 다수의 편견과 달리, 은희경은 경쾌한 걸음으로 낯선 도시인들을 좇는 일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여행지에서 마주한 타인의 삶을 짐작하고 예측해 보는 무던한 반복 속에 어느덧 그녀는 아홉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사이, 작가는 벌써 열 두 해의 삶을 소설가로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왜곡되고 휘어지는 것을 막아 주는, 여행

소설가 은희경 앞에 여행자란 표현은 썩 어울리지 않지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겐 하나의 일탈이자 대안으로 작용하곤 했다. 종종 그녀의 페르소나들은 시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산 속 깊이 숨어들고,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남자는 로키산맥으로 무모한 등정을 떠난다. 그들 모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방을 꾸렸다기보다, 자신이 왜곡되고 부러지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여행을 선택했다. 그들에게 여행이란 단순한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늘 그를 통해 기존과는 다른(혹은 다를 법한) 일상과 눈부시게 재결합하곤 했다. 소설가 은희경에게도 그 같은 일탈의 순간이 필요한 때가 있었다. 

“소설가에게는 ‘까칠한 감정’이 필요한데, 그땐 그런 게 사라진 터였어요. 국내에서 소설가로서의 대접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날 모르는 낯선 곳에서 새롭게 소설을 써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떠났죠, 시애틀로.”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인 나라, 시애틀

2003년, 가족들과 함께 2년간 미국 워싱턴대학의 연구원 자격으로 떠난 그녀는 자신의 바람처럼 매일매일을 여행하듯 낯설고 풍요롭게 보냈다. 시애틀에서의 삶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친숙한 파트너인 남편과 틈나는 대로 동네 언덕을 올랐고, 뉴욕, 워싱턴은 물론 이번 수록작 <지도 중독>의 모티브가 된 로키산맥으로 등정을 떠나기도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미 대륙은 한국에서 생각하던 여행과는 또 다른 호흡법을 들려주었다. 그때마다 경험을 통해 그녀는 또 하나의 선입견을 없애고 새로운 시선들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시골 마을 주유소에서 만난 청년을 보면서 생각해요. 아, 저 친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걸까. 막연히 타인의 삶을 짐작해 보는 거죠. 여행이 제 소설에 자극을 주는 지점은 바로 그런 순간들이에요.”

은희경이 들려주는 시애틀은 기존의 이미지보다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녀는 말한다. 그곳은 불편하지 않은 도시라고. 자연과 사람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자연과 문명이 교묘히 섞인 몽환적인 공간이라고. 또한 주류가 아닌 이방인들에게는 너무도 개방적인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그 긴 여정 뒤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해 끙끙 앓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했다. 세상은 너무 달라져 있었고, 서울은 옛 기억들을 곱씹을 만큼 더딘 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광화문 거리와 인사동의 가게들은 시시때때로 변해 추억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그녀의 고된 적응기는 2년여간 거듭됐다. 그것은 마치 여행 뒤의 여독 같은 것이었지만, 그럴수록 삶에 대한 애정은 강해졌다. 오랜 괴로움 끝에 토해낸 것이 단편<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도 한 그 작품을   통해 그녀는 이제 또 다른 생의 어휘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트래비

그녀의 새로운 키워드, 위악을 넘어선 유연성

사람을 알아 가는 일 자체가 일종의 여행이라면, 그래서 사람을 여행지에 비유하자면 은희경은 어쩐지 프라하를 닮았다. 넓은 유럽 땅덩어리에서도 비교적 최근 몇 년 새 개방을 시작한 차갑고 도도한 동유럽의 이미지는 그녀와 비슷한 점이 많다. 빨간 지붕과 돌계단이 외로워 보이는 낮과 환상적인 야경을 뽐내는 밤을 대하노라면 이 상반된 이미지들이 그녀의 기존 작품과 최근작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카프카의 오랜 추종자이기도 한 그녀는 이 표현을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언뜻 보면 차갑고 냉소적일 것 같은 은희경은 오랜 시간 체류해 들여다볼수록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지닌 흥미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뜻하고 유쾌하며 다소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그동안 위악과 냉소를 화두로 세상을 노래한 그녀는 이제 삶의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전혀 새로운 여행을 준비 중이다. 이번 소설은 랩에 마음을 실어내는 ‘힙합보이’에 대한 이야기. <소년을 위로해 줘>라는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벅차고 흥분되는 이유는 ‘당연히’ 새로울 은희경만의 작품을 기대하는 탓이다. 부디, 오십을 목전에 두고 긴 여행을 떠나는 그녀의 마음 가득 흥겨운 비트박스가 가득하길.  

:: 은희경의 미니 여행 앙케트 ::

★ 여행시 반드시 챙기는 것이 있다면?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책은 절대 넣지 않는다. 낯선 도시의 전광판, 지하철 벽면의 광고, 행인들의 소음까지 보고 듣고 싶은 것들로 가득한 여행지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책은 피하는 편이다.

★ 여행에세이를 쓴다면 희망 도시는?

미국 뉴올리언즈. 재즈의 본고장인 데다 미국에 머물며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종종 원하는 어디든 지원을 해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받지만, 여행을 일로 떠나고 싶지는 않다.

★ 여행을 앞둔 이들에게 본인의 책을 선물한다면?

문학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여성들에게는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타인에게 말걸기>, 문학을 자주 접하지 않는 이라면 <새의 선물>을 추천한다.

★ 여행을 종용하는 영화나 책이 있다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남미를 아름답고 생생하게 묘사해 떠나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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