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달린다. 페달이 경쾌하다.젖을 새 없이 땀이 마른다.아직은 순했던 봄볕 아래에서. ●방해꾼 없는 강섬진강에는 방해꾼이 없다. 물살을 막아서는 하구 둑과 보가 없기에, 섬진강은 때에 따라 불규칙한 얼굴을 보인다. 건기에는 개울처럼 좁고 얕게 흐르다가 우기가 되면 큰 강의 위용을 사납게 드러내는 식이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 풍경이 익숙하다면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강의 모습이란 본래 그렇다. 인위적인 간섭이 없는 자연스러움.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약해지는 물살의 움직임. 자연 하천을 바라보는 두 눈에 애정이 묻어나는 이유
초도를 떠나지 못한 건,순전히 밥상과 막걸리 그리고 바다 때문이라고.몽돌이 구르는 해변에 누워 달콤한 핑계를 댔다. ●6년 만에 초도행초도는 여수에서 뱃길로 77km 거리에 있다. 지도를 펼치면 거금도와 남쪽의 거문도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7.7km2의 면적으로 인천 앞바다의 장봉도보다 좀 더 큰 섬이다. 초도에는 세 개의 마을이 있다. 비교적 큰 섬임에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교통수단은 없다. 섬 가운데 솟아 있는 산상봉 둘레로 일주도로가 놓여 있지만 다른 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민 전용 마을버스조차 다니지 않는다. 그
농촌에서의 하룻밤과 시골밥상에만 끌리다니오산이었다. 여행도 푸짐할수록 좋으니.●말도 쉬어간다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낯설었다. 다섯 시간이 넘는 이동시간을 보고서야 짐작했다. 땅끝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강진은 땅끝마을로 유명한 해남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남쪽 끝으로 향한다는 건 꼬르륵 보채는 위장의 결의를 다져야 하는 일이다. 일찍이 집을 나서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고 버스에 올랐다.해가 중천에 뜰 때쯤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해안 도로를 따라 청보리가 가득하고, 사계절의 초입에는 만개한 유채꽃이 봄을 알린다 하니 드라이브 코스로도
꽃피는 사월, 홀로 떠났다.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보길도로. 돌이켜보면 ‘혼섬’ 여행에서 필요한 건 결국, 슬기였다. ●보길도행, 핸들을 잡았다이른 아침, 전라남도 해남 갈두항. 첫 배를 기다리는 차량 줄의 꽁무니에 섰다. 애써 달려온 보람도 없이 결항이라니. 강풍 탓이다. 바람이 잦아들고 운항이 재개되기까지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운전석에 앉은 채로 꾸벅이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으니 깊은 잠은 언감생심이다.보길도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완도 화흥포항 또는 해남 땅 끝에 위치한 갈두항에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
전라남도 목포시 고속버스터미널. 자전거가 출발했다. 영산강 하구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 바퀴는 무안군과 함평군에 흩어져 있는 명산, 사평, 식영정, 석관정 나루터에 찬찬히 자국을 남겼다. ●삶을 닮다자연의 이치 중 하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일까. 강길을 따라가는 자전거 페달도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향하곤 한다. 그러나 자전거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건, 페달의 방향이 아니라 바람의 움직임이다. 자전거는 바람을 등지고 매끄럽게 나아가기도, 바람에 부딪치며 힘겹게 저항해 가기도
색깔에 이끌려 서남부 땅끝 바닷가를 달렸다.보라색으로 일렁이다 옥색으로 깊어졌고, 노르스름하게 맛났다.신안 목포 영광은 그렇게 색으로 물들었다. 순전히 색깔 때문이다. 신안 퍼플섬(Purple Islands)의 보랏빛 유혹! 색깔을 전면에 내세운 여행지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1004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해서 ‘천사 섬’이라더니 정말 섬이 많다. 육지와 신안의 섬들을 연결하는 천사대교를 건너다보니 좌우로 올망졸망한 섬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수많은 섬 사이를 40~50분이나 비집고 들어가니 어느 순간 버스 정류장이며
그늘진 마음에는 볕이 필요하다.초록 마을 보성에서 언 몸을 녹였다. ●겨울은 가고 봄이 온다제한된 여행의 크기와 비례하게 마음은 무채색으로 변해갔고, 나는 어떻게든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에 온기를 채우려 애썼다. 어느 날엔 노래를 불렀고, 또 어느 날엔 그림을 그리다가 술을 마셨다. 그러다 결국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는데, 그건 바로 식물을 곁에 두는 일이었다. 작은 생명체를 하나둘 집에 들이자 생기가 돌았다. 바라만 보아도 싱그러운 기운을 얻었고, 새싹이라도 쑤욱 틔우는 날이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초록이 주는 에너지는 이토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유난히 짧다.가진 게 두 발뿐인 뚜벅이에게는 더욱 그렇다. 관광택시에 올라 곡성을 마음껏 담았다.●멋쟁이 빨간 넥타이 기사님 뚜벅이는 괴롭다. 가고픈 곳은 많은데 막상 갈 수 있는 곳은 적다. 아쉬운 듯 돌아서고 다시 찾는 게 여행의 묘미라고 하지만, 어쩐지 늘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다. 곡성역 앞에서 푸른색 니트에 빨간 넥타이를 한 기사님을 만나자마자 마음이 놓였던 이유다. “어디 가실 거예요?” 기사님께 형광펜을 친 추천 코스 목록을 내밀었다. “성륜사는 다른 관광지들이랑 너무 멀고….” 아뿔싸. 가고 싶은
섬을 오가는 여객선 3척의 이름조차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섬. 구국의 불길이 타올랐던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를 걸었다. ●비로소 안심하는 곳완도 화흥포항에서 소안도까지는 1시간. 뱃길 말미에 노화도 동천항에 잠시 기항한다. 오래 전, 소안도는 제주를 오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과 같은 섬이었다. 제주권을 벗어난 바다가 워낙 거칠고 험했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이곳 섬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안심했다고. ‘소안’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됐다. 소안도는 남북의 두 섬이 길이 1
살포시 낀 물안개와 산에 앉은 구름 띠가 몽환적이다. 차분함은 노랗게 물든 나무와 희끄무레한 억새 몫이다. 마음껏 뛰노는 아이가 싱그러움마저 채우니 부러울 게 없다. ●자연으로 돌아간 아이들 곡성은 섬진강, 기차마을, 영화 의 촬영지로 유명하지만, 여전히 숨어 있는 선물이 많은 곳이다. GKL사회공헌재단의 꿈희망여행은 곡성에서 ‘안개마을’이라는 보물을 캤다.안개마을은 목동 1~3구와 뇌연, 뇌죽, 고달, 수월리 7곳이 모인 연합 마을이다. 꿈희망여행 목적지로 2018년에 합류해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쌓았
2020년 초 고흥과 여수 사이에 4개 다리가 개통되면서 적금도, 낭도, 둔병도, 조발도는 양방향에서 차량으로 오갈 수 있는 섬이 되었다. 섬에 다리가 놓이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의 섬을 기억하는 일, 누구의 몫일까? ●밧줄의 미학적금도적금도는 2016년 팔영대교 개통으로 고흥반도와 연륙된 최초의 여수 섬이다. 적금도란 이름은 ‘금을 쌓아둔 섬’이라는 뜻이다. 오래전부터 금맥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일제 강점기부터 수차례 채광을 시도했지만 성공한 예는 없었다고. 적금도는 외형적으로는 평범한 어촌마을
만물의 관성은 시간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목포가 달라졌다. ●목포는 낭만항구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목포에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연고지도 아닌 목포에 말 못할 사연이라도 묻어둔 걸까? 아니다. 그저 목포를 애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갖게 된 애타는 마음이다. 목포는 1897년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개항한 항구도시다. 자주적으로 개항한 항구도시이자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4대 항구도시 중 하나임에도 목포의 인구는 약 22만명. 부산(340만명)이나 인천(294만명) 등 다른 항구도시에
동네 마당에서 새 소리를 듣고 길고양이와 알 수 없는 밀당을 하며 물 좋은 계곡에서 꾸밈없는 시간을 보냈다. 대단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귀한, 그것은 유독 가족의 특성이기도 했다.●순천의 순한 기운기분 탓일까. 순천에 가까워질수록 한결 온순해지는 것 같다. 언젠가 순천에 다녀온 누군가가 ‘순하다’고 말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곤두서 있던 날도 뾰족했던 성미도 조금은 잠잠해지고 있었다. 순천역에 도착해서도 목적지까지는 차로 40분을 더 가야 했다. 꽤 굽이진 도로가 이어졌고 창문 사이로 드는 뙤약볕이 팔뚝 아래 마
청산(靑山)이라는 이름이 전혀 버겁지 않다. 이곳저곳이 실로 푸른 섬이다. 다섯 번째 청산도 여행에서는 그 푸름에 조금 물들었다. 느긋하고 풋풋해졌다. “오늘은 배가 안 뜬다네요.” 완도 민박집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걱정이 없는 것은 하루 더 묵어갈 손님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섬으로 갈 때 일기예보를 보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미리 살피고 대처하던 여행이 언제부터 이리 느슨해진 걸까? 대중교통에 의지했던 여정이 차를 운전하고 다닌 후부터 많이 달라졌다.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어지고 시간에 대한 개념
물 건너 섬, 그리고 그 뒤쪽으로 가물거리는 또 하나의 섬. 뿌연 해무에 둘러싸였던 하늘과 바다가 서서히 그 경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리와 모습을 가늠할 수 없었던 섬들 사이로 생일도가 태어났다.●생일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약산 당목선착장에서 생일도까지는 불과 20분 정도의 거리, 여객선이 생일도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서성항 구석구석이 더욱 또렷해졌다. 선착장 대합실 지붕에 얹혀 있던 낡은 생일케이크가 사라진 대신 주차장 한쪽에 희고 커다란 새 케이크가 세워졌다. 공사 중인 대합실이 완공되었을 때 케이크가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갈
아따, 난중에 목포 한 번 다시 들르쇼. 겨울엔 또 색다른 매력이 있응께.택시아저씨의 친근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다음번 방문을 기약했다. 목포는 멀고도 가까웠다. ●숫자, 그 이상의 의미지극히 촌스러웠다. 목포가 아니라 나 말이다. 국내여행을 제법 다녀봤지만, 해상 케이블카는 낯설었다. 클리셰하다는 이유로 왠지 피하곤 했던 날들이 있었다. 가장 클리셰한 게 가장 보편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던 거다. 편협했던 사고를 반성하며 생애 처음으로 해상 케이블카에 올랐다. 탑승하자마자 꽤나 훌륭한 선
어느 섬이 가장 좋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난 지금 떠나는 섬이 가장 설레고, 바로 떠나온 섬이 가장 그립다. 지금은 그 섬이 관매도다. ●이름에만 있는 매화미세먼지 하나 없는 모처럼의 파란 하늘, 여객선은 잔잔한 바다를 가르며 유유히 나아갔다. 하조도, 라배도, 관사도, 소마도, 모도, 대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은 마치 바다의 정류장과 같았다. 선장은 자상하게도 큰 배를 멈춰 세우고는 고작 한두 명을 내려 주었다. 가까워지고 멀어질 때마다 섬의 모습이 정성스럽게 다가온 까닭이다.
사계절 모두 예쁜 여수라지만 이곳의 절정은 봄이다. 꽃이 빚어낸 화사함, 갯장어와 새조개 등 맛의 향연, 그리고 살랑살랑 바람 부는 밤바다에서의 시간까지. 이 찬란함을 맞이할 순간이 한 달이나 남은 건 어쩌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수의 편지일지도 모른다.●흩날리는 꽃잎 속을 거닐며여수의 봄은 화사하다. 4월 초까지 남아있는 동백꽃과 벚꽃, 5월의 아카시아꽃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색 때문이다. 이런 봄의 향연을 느끼기 좋은 오동도가 여수 여행의 출발점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다. 향일암을 제외하고는 관광지마다 이동 거리가 짧아 하루 만
노두길로 이어진 섬과 섬. 걸음은 들물에 사라진 노두길 앞에서 멈추어 선다. 바닥에 주저앉아 건너편 섬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난다.그토록 바라던 여유로운 시간. 이제부터 계획에 없던 진짜 여정이 시작된다. ●“뭣이 그렇게 바쁘당가요?”여객선 객실 안, 여객선이 소악도에 가까워질수록 남자들은 불안해 보였다. 이윽고 섬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지금 도착하면 오늘 다 돌아보고 나올 수 있지요? 저희는 차를 가지고 왔거든요.” 어이없는 표정을 앞세운 아주머니의 한 말씀. “택도 없는 소리 하질 마소
봄이다. 봄소식은 남쪽에서 온다. 남쪽의 먼 섬들은 봄이 더 간절하다. 뭍에 나가 살았던 주민들이 돌아와야 마을도, 섬 개들도 살 맛이 난다. ●맹골도의 대장 개 맹골이전남 진도군 맹골도는 먼 섬이다. 위도상으로 보면 추자도나 여서도보다 남쪽은 아니지만, 망망대해에 어깨 기댈 섬이라고는 곽도와 죽도가 고작이다. 그래서 겨우내 섬은 더욱 휑하니 비워졌다. 처음 맹골도를 찾았을 때는 한겨울이었다. 역시나 섬은 적막했다. 텐트와 약간의 식량을 배낭에 넣어 간 것은 섬 주민들에게 잠자리나 식사 도움을 받기 어려우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텐